부산광역시 서구청 문화관광 스킵네비게이션

서구역사
서구역사
고대시대

고대시대

한반도 철기시대의 시작은 기원전 4세기부터이며, 본격적인 철기시대로의 진입은 기원전 2세기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 남부 지역은 철기시대로 진입한 이후 삼한(三韓)으로 발전하였다. 삼한은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이 있었는데, 모두 78개의 작은나라로 이루어졌다. 부산의 경우 변한에 속한 독로국(瀆盧國)이 있었으며, 독자적인 정치단위체로 발전해 나갔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거칠산국(居漆山國)·내산국(萊山國)·장산국(萇山國) 등이 부산에 존재하였다고 하는데,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면 서구 또한 독로국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의 대표적인 삼한시대 유적은 구서동 유적, 노포동 유적, 수민동 조개무지, 동삼동 조도 조개무지 등이다. 서구에서는 삼한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주변 지역과 동일한 문화권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철기시대에는 농업생산력이 더욱 증대되면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독로국이 속한 변한사회는 점차 정치적으로 통합되어 나갔다. 4세기에 이르면 동남해안의 대왜(對倭) 교섭을 주도한 독로국과 낙동강 하구의 구야국(狗倻國)이 연합하게 된다. 두 나라는 금관가야의 중추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여, 4세기 이후부터 5세기 초까지 문화를 공유하였다. 서구 지역은 독로국 소속의 작은 읍락으로 존재하면서 지리적으로 부산과 김해 등과 교류 및 왜와의 국제적인 대외교류에도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후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南征)으로 낙동강 하류의 가야연맹왕국은 와해되어 분열되었다. 5세기 중엽에 이르면 이 지역에 신라(新羅)가 진출하면서 신라의 문화가 급격하게 유입된다. 정치적으로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독로국은 거칠산군(居柒山郡: 지금의 연제구)으로 편제되었다. 거칠산군 산하에 대증현(大甑縣: 부산진구)과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 기장군)을 설치하였는데, 서구는 대증현에 속했으며 연산동 고분군을 조성한 집단의 지배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 복속된 후 해산물을 공납하는 지역, 해안가에 접해 있는 변방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신라는 660년과 668년에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685년 신문왕은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를 주-군-현으로 나누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는데, 서구가 속한 부산 지역은 양주(良州: 지금의 양산)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757년에 신라는 9주를 비롯한 지방 군현의 이름과 중앙 관청의 이름을 모두 한자식으로 바꾸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실시하였다. 이는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는데, 부산은 동래군(東萊郡)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동래군에는 두 개의 현이 있었다. 그 중 서구가 속했던 대증현은 동평현(東平縣)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서구의 신라 유적으로는 초장동 고분(草場洞 古墳: 초장동 3가 38번지 일대)이 있다. 초장동 고분은 1991년에 발견되어 부산시립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이 고분은 천마산 북동쪽 경사면 해발 50~60m에 있는 소형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으로서 이러한 무덤의 구조는 김해 예안리, 부산 당감동 등에서도 발견된다. 유물도 함께 출토되었는데, 굽다리 접시[高杯] 3점, 뚜껑 3점, 짧은 목 항아리[短頸壺] 1점, 손잡이항아리[把手附軟質甕] 1점, 굽다리 긴 목 항아리[臺附長頸壺] 1점 등 모두 9점이다. 굽다리 접시는 기벽이 얇고, 다리 끝이 위로 반전하는 특징을 보인다. 뚜껑은 단추형 손잡이가 달렸고, 아가리가 수직으로 뻗는다. 이 굽다리 접시는 6세기 전반의 신라 굽다리 접시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서구 또한 신라의 문화가 적극적으로 수용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무덤의 구조는 바닥에 잡석을 깔고 깬 돌로 돌덧널을 만든 것으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의 신라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된다. 돌덧널의 규모가 2m 이하의 소형이고, 출토 유물도 소량인 점으로 볼 때, 피지배층 또는 하위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초장동 고분과 같은 시기의 하위 신분층의 고분군으로는 괴정동 고분군과 부산 오륜대 고분군 등이 있다. 이와 함께 토성동 토성(土城) 또한 주목되는데, 토성은 1913년에 지표 조사가 실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지표 조사 담당자는 일본인 도코우[都甲玄卿]였는데, 이 조사에 의해 토성은 임진왜란 때 축조된 일본식 성이 아니라 삼국시대의 고성(古城) 양식으로 밝혀졌다. 또한 토성동 성터는 아미동에 있었던 옛 화장장(1948년에 당감동으로 이전) 부근을 중심으로 아미골 아래쪽에 반월형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내 면적 9,900~13,200㎡, 성의 높이 1.2~1.5m가량 되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 가야 때의 성이 주로 반월형의 형태를 띠므로, 토성동 토성 또한 신라나 가야 때의 성으로 추정된다. 토성동 토성은 1906년 부산고등여학교(부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 건립과정에서, 이후에는 토성초등학교 등의 건물이 들어서면서 그 흔적이 사라져 지금은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초장동 고분과 토성동 토성의 존재는 이 시기 서구 지역이 신라 변경의 요충지로서의 성격을 지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9세기 말~10세기 초 이후 후삼국의 분열기에 들어오면 전국 각 지역에서는 호족 세력들이 발호하였고, 고려와 후백제는 치열한 영역 다툼을 벌였다. 특히 부산 지역을 두고 각축을 벌였는데, 후백제의 견훤은 울산과 경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부산을 휘하에 두고 신라를 위협하였다. 후백제의 견훤이 절영도(絶影島: 지금의 영도)의 명마를 고려 태조 왕건에게 선물로 보냈다는『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록을 보아, 영도와 인접한 서구 또한 후백제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백제의 영토였던 부산 그리고 서구는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더불어 지위가 격하되는 등 정치적 시련을 겪게 된다.

서구청 홈페이지 내 게시된 자료는 공공누리 출처표시 후 저작물 변경없이 이용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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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수정일 : 2018-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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