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칼럼-문혜정(닥밭골 반딧불이 입주작가)
- 2021-08-30 16: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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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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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칼럼-문혜정(닥밭골 반딧불이 입주작가)
서구칼럼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이자 통로
문 혜 정
닥밭골 반딧불이 입주작가
몇 달 전 동생이 느닷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물어왔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냐고 되묻자, "그냥 아무 그림이나."라는 어정쩡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좋아하는 대상을 드로잉하는 것부터 시작해보라고 적당히 일러주었다. 전화 목소리가 어딘지 맥없이 들려 요즘 일이 많이 힘든 모양이라고만 짐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 동생이 회사에 사표를 냈다가 반려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예술처럼 확실한 길은 없다. 또 세상과 관련짓는 데 예술처럼 적당한 길도 없다.
인용한 글은 괴테가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이자 세상을 향한 통로라. 괴테의 말이 내게는 예술이란 힘든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잠시 기대어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세상을 향해 뛰어들 힘을 마련해주는 발판과 같다는 뜻으로 읽힌다.
향유로서의 예술영역에는 진입장벽이 거의 없다. 그러나 창작으로서의 예술영역은 좀 다른 것 같다. 누구나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면 종이에 연필로라도 그리면 되고, 시에 관심이 생기면 쓰면 되고, 노래라면 언제든 목청껏 부르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어쩐지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담이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하게 여겨진다.
문득 어느 할머니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몇 년 전 부산문화재단에서 주관한 시민 대상의 프로젝트에 강사로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신청한 시민들 중에는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도 더러 있었다. 그날은 물감 대신 매니큐어를 이용해 투명한 유리잔에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한 할머니가 눈을 가늘게 뜨고 떨리는 손끝을 몇 번이고 진정시켜가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도와드리려고 다가가 보니 연세에 비해 감각적으로 색을 다루시는 데다 꽤 오밀조밀한 꽃밭 그림을 완성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조금 놀란 마음으로 한두 번 그려본 솜씨가 아닌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나도 소싯적에는 그림 그리는 거 진짜 좋아했는데…. 국민학교 졸업하고 근 60년 만에 다시 해보니 잘 안 되네요."
할머니는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릴 일이 다시 있었을까 싶다며 수줍게 웃으셨다. 프로젝트가 모두 끝난 후에도 합창연습에 가신다며 활기찬 얼굴로 복지관을 오가는 할머니를 종종 뵐 수 있었고, 어느 땐가는 맛있는 김장김치 한 포기를 얻어먹은 적도 있다.
요즘 같은 시국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려던 동생의 상황을, 현실의 무게에 눌려 다시 주저앉게된 그 마음을 아무리 헤아려 본들 위로의 말을 찾기가 힘들다. 그저 오랜만에 연락해서 드로잉은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도서관이든 문화센터든 가까운 미술수업을 찾아보고 여의치 않으면 만나서 함께 좋아하는 거나 자유롭게 실컷 그리자고 제안해볼 생각이다. 동생의 마음에 작지만 든든한 예술텃밭이 무성해지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