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서구 서대신4동 10통·11통 지역으로 서대신4동과 사상구를 연결하는 해발 220m의 고개에 소재한 마을이다. 옛날 이 곳에는 조그마한 주막집이 몇 채 있었는데, 6.25동란 전후 피란민이 몰려와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하여 당시 마을 주민 대부분이 꽃재배를 생업으로 삼고 국화·카네이션 등을 시내 꽃가게에 내다 팔거나 학교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 학교 앞에서 직접 팔아서 생활을 영위하면서부터 ‘꽃마을’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서구의 발전 잠재력을 지닌 꽃마을은 2003년 마을 진입도로가 확장되고 현대식 건물들이 새로 들어서면서 현재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특히, 최근에는 구덕산자락 꽃마을 주변에 조성된 구덕청소년수련원 등 이 일대는 지역주민과 청소년을 위한 문화요람으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구한말 일본인 거류민단이 들어오면서 빈민촌이었던 이곳에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들어섰고 해방이후 한국 전쟁과 피난, 부산시내 판자집 철거정책으로 산으로 산으로 떠밀려온 사람들이 삶의 희망을 꿈꾸며 일궈온 마을. 부산 산동네의 지역성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는 산복도로 르네상스사업과 행복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커뮤니티 시설이 건립되고 아미동 주민들의 마을공동체가 활발히 운영하며 이 곳에서의 삶을 미래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소재지 :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2동 일원 ※ 닥밭골 행복센터: 보동길 278번길 5(닥밭골 행복센터)
부산 서구 동대신2동 9통 일대에는 대문도 없이 모두 80여 가구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닥밭골이라 불리는 마을공동체가 있다.
닥밭골은 옛날 닥나무가 많이 나는 마을 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역은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마을이다. 닥밭골 마을은 오랫동안 개발에서 소외되어 1970년대의 모습 그대로 정체된 곳으로 인구의 유입은 없고 유출만 있어 빈집이 많고 주민의 평균연령이 60대에 이른다.
이러한 삭막한 마을이 대변신을 거듭하여 지금은 마을 전체가 마치 갤러리가 된 닥밭골 벽화마을로 탈바꿈하였다. 묵은 때를 벗은 담벼락과 주택 벽면이 초록·노란·파란색을 입으면서 마을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마을 주민들의 표정이 덩달아 환해지게 된 것이다. 또한 마을의 대변신은 입소문을 타고 닥밭골 마을을 찾는 발길을 끊이지 않게 하였다. 마을의 변신을 성공적으로 일군 마을 주민들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안전행정부 공모사업에 응모하여‘작은도서관’과‘닥밭골북카페’를 잇따라 만들어냈다.
약 5,000권의 도서가 갖추어진 작은도서관은 주민과 학생들의 문화공간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 또한 닥밭골북카페는 커피와 함께 좋은 책을 보며 미술품도 감상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다. 도자기 작품 전시실, 강의실 등으로 오밀조밀 공간을 잘 활용했다. 2011년 폐·공가에 한국전통 정원형 의‘그린테마공원’이 만들어지고 2012년 부산시 행복마을 만들기 사업의 대상지로 선정되면서 마을의 거점시설인‘닥밭골행복문화나눔터’가 조성되었다. 폐·공가에 만들어진 행복문화나눔터는 지상 2층, 연면적 115.96㎡ 규모로 지역작가들의 작품 활동 공간과 주민들의 평생학습 공간, 창업아카데미교실, 천연비누와 생활도자기교실 및 전시·판매장 등 복합기능시설이다. 이곳에서는 지역출신작가 및 강사들의 재능기부를 통해 인문학강좌, 산만디오감트레킹 등 차별화된 주민참여 및 체험형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013년 5월에는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닥밭골행복협동조합’을 구성하였다.
지역공동체의 구심적 역할을 하면서 마을의 자립기반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2014년에는 부산시 마을공동체역량강화사업의 지정공모 분야에 선정되어‘닥밭골행복협동조합’을 중심으로 대신동 일원 마을 역사를 바로 알기, 닥밭골의 당산제의 마을 축전 승화, 지역민 대상 문화예술교육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문화예술공작소사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2016년 주민제안사업으로 『소망계단192』에 조성한 포토존 및 휴식의자는 만디버스 승하차 지점과 연결 돼 탐방객들이 자주 찾을 뿐 만 아니라 주변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찾고 담소를
나누는 자리로 변하고 있다.
서대신 2동의 옛 서구청 뒤편 언덕지역에 위치했던 마을이다.
대신동의 옛 지명은 "닥밭골" 또는 "고분도리" 라고 하였다. 고분도리란 마을 이름은 "고불"과 "드르"의 합성어에서 온 이름이 아닌가 생각한다.
고불은 고리짝을 만드는 들이란 의미가 아닐까 한다. 옛날 보수천가에는 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이 버드나무 등을 이용하여 고리짝을 만들어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 이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고분도리마을이라고 한 것 같다.
서구 암남동 한국수의과학검역원부산지원(동물검역소) 앞에 있는 해안으로 감천만에 열려있다.
"몰지포(沒稚浦)"라고도 불리는 모지포는 본래 "모짓개(浦)"에서 비롯된다.
암남공원의 서쪽 끝인 모지포말과 동양시멘트 공장사이에 만입된 작은 포구로 앞 바다는 수심이 얕고 배후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일찍부터 인간의 주거지로 되어 온 곳이다.
암남동 패총이 자리 잡고 있으며, 조선조 말(1850년경) 이 곳에 10여명의 어민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만의 안쪽에는 모지포 마을이 아담하고 포근하게 남아 있다.
개방시간 :
동절기 09:00~17:00 / 하절기 09:00~18:00소재지 : 부산광역시 서구 남부민동 611-350
고 이태석 신부 생가이태석 신부님은 1962년 9월 부산시 서구 남부민2동 산35번지(현, 해양로 22번길 13)어려운 환경 속에서 태어나 성직자와 의사로서 사랑과 봉사의 참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2001년 사제서품을 받자마자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 가서 선교 · 의료 · 교육 · 문화 등 전 분야에서 적극적인 봉사활동을 펼치셨고 열악한 톤즈 마을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으나, 2010년 1월 대장암으로 4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나눔의 시작은 내가 가진 것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며 가난한 이와 아픈 이들, 나약한 이들을 위해 사랑의 다리가 되고자 하셨습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다 가신 이태석 신부님의 큰 사랑과 이 세상에 남긴 숭고한 나눔의 정신을 기리고자 2014년 10월 ‘이태석신부 생가’를 부산광역시 서구청에서 복원하였습니다.
참사랑 탐방길송도성당에서 풍금을 치던 어린 이태석 신부님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서로 대화하셨습니다.
오늘도 그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와 내면으로 대화를 하시며,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다시금 일깨워주십니다. 지금 이 시간과 이 장소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과 새롭게 서로 사랑하라고... 오늘도 그분의 말씀은 새로운 가르침과 힘으로 다가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정말 멋진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고,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의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은총과 당신의 마련하심으로 많은 것을 그분에게 선물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선 당신 성령의 이끄심으로 그분과 송도성당에서의 만남을 우리에게 마련하셨습니다. 우리가 같은 시대와 같은 장소를 공유하면서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거룩한 마음을 이 시대에 함께 가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참사랑 탐방길을 만들어 보았습니다.참사랑 탐방길 기본 과정1. 송도성당 : 이태석신부님의 삶을 그린 영상물 시청2. 이태석신부 생가, 피아노가있던 친구집 둘러보고 명상하기3. 송도해수욕장 → 기암괴석, 퇴적층암석군 → 출렁다리 → 송도해안볼래길 → 암남공원(버스정류소: 2.5km)탐방 대상별로 탐방 테마와 코스가 변동이 되어집니다.
샛디란 억새풀과 띠풀을 말하는데 샛디고개라 하면 억새풀과 띠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현 초량동에서 용두산 주위 그리고 부평동과 부민동에서 이어진 남부민동 일대가 모두 억새풀과 띠풀로 우거진 초원지대라 이 곳 넓은 지역을 통털어 샛디라 불렀다.
그 후 인가가 생기고 현 초량동을 초량이라 이름 짓고 용두산 주위에 왜관이 서고 지금의 부평동, 부민동, 토성동, 아미동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가는 가운데 샛디의 초원지대는 좁혀져 갔다.
그런 가운데 1929년 일본인들이 이 곳을 매립하기 시작하여 1931년 남부민동 방파제를 축조하고, 1939년 남항일대를 매립하여 송도로 가는 아랫길이 생겼는데 이 아랫길이 생기기 전에는 송도로 가려면 이 샛디고개를 넘어야 했다.
또한, 당시의 부민동(현재의 부민동ㆍ남부민동ㆍ아미동ㆍ토성동ㆍ초장동ㆍ충무동 일대를 말함) 아래 富民浦 주위를 샛디가 우거진 목짬이라 하여 샛디목이라 했는데, 그 샛디목의 富民浦는 寶水川과 어울린 바다목으로 지금의 충무동 한전 주위를 말한다.
대티고개(大峙峴)라는 명칭은 아마도 조선시대 말기 경까지 대신동일대가 동래부 사하면 대치리에 속했던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구덕산의 산덩성이에 해당되는 시약산과 아미산 사이에 있는 재(嶺)로써 해발고도 100~200m에 이른다.
이 고개는 1930년 고개를 따라 새로운 차도가 생기기 전까지 옛 부산 쪽에서 하단지역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교통로 구실을 했다. 그 이전에는 옛 부산 방면에서 하단이나 괴정 방면으로 가려면 지금의 아미동에서 산으로 올라 법원 뒤쪽 고개를 넘어 현재의 대티터널 위쪽의 대티고개를 넘어서 괴정동 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다가 1971년 4월 25일 고개 밑에 대티터널이 개통되어 양편의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사하구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1993년 지하철 1호선이 대티터널과 나란히 달리자 대티고개의 옛 교통로 기능은 많이 줄어들었다.
이 고개 양쪽 언덕에는 개나리ㆍ무궁화ㆍ벚꽃이 많이 심어져 있어서 경관이 수려한 곳이기도 하다.
아미산 남쪽 산록의 안부(鞍部-산마루가 움푹 들어간 곳)에 해당되는 이 고개는 현재 서구민의 휴식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 심은 벚꽃나무 고개로 유명하나, 옛날에는 밤나무가 울창하고 무성한 숲과 송림이 우거져 까치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한다.
까치고개란 이 곳 고개에 까치가 유별나게 많이 찾아든 데서 비롯된다. 1910년 일제의 강점을 전후하여 지금의 천주교 아파트 부근에 화장장이 설치되면서 영혼을 달래는 위령제가 자주 열렸고, 그 때마다 제물의 음식 찌꺼기가 까치먹이로 제공됨에 따라 아미동ㆍ감천동ㆍ괴정동 일대의 까치가 한낮에도 먹이를 찾아든 데서 까치고개라 부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까치가 울창한 송림에 집을 치고 서식한 이곳에서 한 노파가 까치의 서식을 도와주면서 까치의 집단서식이 계속 이어지게 됐다고도 한다. 까치를 유달리 좋아했던 노파는 밤낮없이 까치와 어울려 지냈고 노파가 죽자 벗을 잃은 까치들이 생전의 노파와의 정을 잊지 못해 이 근처를 맴돌게 되면서 이곳이 까치가 많이 사는 곳으로 알려 졌다고 한다.
한 때 이 고개 중턱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왜구 침입에 항거해 싸우다 전사한 임란공신 김근우公의 묘소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져 역사의 의미가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57년 화장장이 당감동으로 이전한 후 아미동은 주택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감천2동에서 아미동 山谷을 따라 지어진 주택들과 아미골에서 올라가며 지어진 주택들이 잇따라 이어져 있다.
1970년대에는 오솔길과도 같았던 까치고개가 확장되고, 1993년에는 괴정동 쪽으로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개설되어 현재 서구와 사하구를 잇는 우회도로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