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1879~1910)가 남긴 글씨로 만주(滿洲)의 여순 감옥(旅順監獄)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할 때까지 쓴 200여 점의 글씨 가운데 한 점으로,「見利思義見危授命」의 8자인데「이로운 것을 보았을 때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에는 목숨을 바쳐라」는 뜻이다.
이 작품과 다른 곳에 수장되어 있는 20점의 유묵(遺墨)이 보물 제569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과「第一江山」(숭실대학교박물관 소장)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글씨에는 장렬한 최후를 앞에 둔 애국지사의 충혼과 강인한 의지가 힘차고 활달한 필치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그의 유묵에서는 서명부분에「大韓國人 安中根 書」라고 쓰고 혈서(血書)로 인해 한 손가락 마디가 없는 장인(掌印)을 인장으로 대용하고 있는 점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안중근은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 출신으로 유년시절 한학(漢學)을 공부하고 14세에 신천(信川)에서 프랑스 신부 밑에서 천주교신자가 되었다.
1905년(光武 9年)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이 체결되자 의분을 못 이겨 1907년 7월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북간도(北間島)를 거쳐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1909년(隆熙 3年) 이범윤(李範允), 최재형(崔在亨)과 함께 의용군(義勇軍)을 조직하고 좌익장군(左翼將軍)이 되어 두만강을 건너 경흥(慶興)에 들어와 일본군 50여명을 사살하고 회령(會寧)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그 해 10월 조선침략의 주도적 인물인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장상(藏相) 코코프체프와 만주 하얼빈(哈爾賓)에서 회담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안중근은 이 기회에 그를 제거코자 10월 26일 하얼빈역에 닿아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경계망을 뚫은 후 10보 이내의 거리에 접근하여 권총으로 이토오히로부미에게 세 발을 명중시켜 즉사케 하였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는데, 다음해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사형으로 순국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글씨에 뛰어나 많은 유필(遺筆)을 남겼으며, 옥중에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정확히 분석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키도 하였다.
서구청 홈페이지 내 게시된 자료는 공공누리 출처표시 후 저작물 변경없이 이용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