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총통(銃筒)은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의 중화기(重火器) 제작수준이 일본보다 훨씬 앞섰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우리 고유의 화포(火砲)이다. 총통의 제작은 조선초기 태종(太宗)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명칭은 각종 포의 크기에 따라 제일 큰 것부터 차례로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천자ㆍ지자ㆍ현자ㆍ황자총통(千字ㆍ地字ㆍ玄字ㆍ黃字銃筒)으로 불렀다.
현존하는 2문중(2門中) 하나로 그 체형(體刑)이 천자총통(天字銃筒) 다음으로 큰 유통식화기(有筒式火器)이다.
이 총통은 청동제로서 1557년(明宗12年) 4월에 주조된 것으로, 육군 박물관에 수장된 지자총통(보물 제861호)보다 1개월 후에 주조되었다.
그 제작법은 포구(砲口)외 통신(筒身)을 연한 포미(砲尾)에 이르기까지 그 둘레의 차는 없고, 죽절(竹節)모양이 시조되어 있다.
모두 9조(條)가 시조되었는데 통신에 5조, 그리고 통신과 약실경계선(藥室境界線)에 쌍조(雙條), 약실(藥室)에 2조를 시조(施條)하였는데, 이는 보물 제861호의 총통시조(銃筒施條) 방법과는 달리 한결같은 규격으로 시조하였다.
손잡이인 거금(擧金)은 두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선혈(線穴)은 약실 뒤쪽 좌우에 뚫려 있다. 이 총통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있다.
『嘉靖三十六年 四月 日 金海都會 鑄成地字 重壹白肆拾肆斤□兩 監造前棚管 李大胤 匠人 金連』
이 총통으로 발사할 수 있는 것은 큰 화살이나 탄환인데,「火砲式諺解」에 의하면 중약선 1조, 화약 20냥, 토격(土擊:화약과 발사할 탄환 사이를 흙으로 다지는 것) 3촌, 조란환(鳥卵丸) 200개, 혹은 장군전(將軍箭)을 쏠 때는 격목 6촌으로 전중(箭重) 29근 8냥을 발사하면 사정거리는 약 800보에 이른다고 한다.
이 유물은 1969년 10월 9일 김율규(金律奎)씨가 경남(慶南) 창원군(昌原郡) 내서면(內西面) 금성리(金城里) 신성부락(新城部落) 뒷산에서 채석작업 (採石作業)중 발견한 것으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으며 명문이 있는 것으로 유일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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