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인의 부산 진출과 거류지 형성
개항이 되기 전 부산은 한가로운 어촌이었다. 개항이 되기 전 부산포는 배의 항해가 어려울 만큼 해조류가 무성하여 어장으로서 최적의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개항 직전 부산포에는 130여 곳에 어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2천여 어민이 여기에 종사했고, 이 무렵 부산에는 이미 일본인 80여 명이 살고 있었다.(2) 근대적 도시 시설의 집중
서구 지역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강제병합 이후 ‘서부유지’로 지칭된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우선 한국와사전기주식회사(1910년 설립, 1913년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로 개칭, 부평동·토성동) 등 주요 산업시설과 함께 농상무성 우역혈청제조소(1911년, 1918년 ‘조선총독부 수역혈청제조소’로 개칭, 암남동)와 경상남도 수산시험장(1936년, 충무동) 등 공공기관이 설립되었다. 또 송도해수욕장(1913년, 암남동)이 개장한데 이어, 대정공원(1918년, 토성동), 부산공설운동장(1928년, 동대신동) 등 근대적 여가·체육시설과 함께 부산부립병원(1936년, 아미동)과 같은 공공의료기관까지 자리 잡으면서, 1920년대 이후 서구 지역의 도시발전이 크게 진전되었다. 특히 공원과 운동장은 여가 활동과 신체의 단련, 대중 집회의 공간으로 근대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 시설이므로 서구가 행정·문화·주거 중심지로서의 도시기능을 담당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국내 최초의 공설해수욕장인 송도해수욕장은 당시부산의 대표적 근대휴양지였다. 휴게소, 탈의장, 잔교 등의 설비를 갖추었고, 여름철에는 1시간마다 발동기선을 운항하며 부산 시내의 일본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후 남항매축공사로 도로망이 확충되면서 송도와 시내가 더욱 빠르게 연결되었다. 이로 인해 1936년 송도가 부산부로 편입되었고, 지금의 서구 모습이 갖추어졌다.(3) 소외된 조선인 마을
일제강점기 지금의 서구는 일본인들에 의해 ‘신시가지’로 개발된 지역이었다. 서구의 일본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조선인들은 일본인 가옥 주변의 비탈이나 고개로 올라가 터전을 잡았다. 이에 따라, 서구의 거주지역은 시내에서 가까운 토성동, 부민동과 대신동 일대의 평야지대에는 일본인들이, 대신동과 아미동, 남부민동, 초장동 등의 고지대에는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형태로 분리되었다.(4) 전시체제기 동원과 저항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부산은 일제의 대륙진출 관문이자 병참기지로서 군사적 거점이 되었으며,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즈음에는 병력수송과 본토 방어에 있어 주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패전이 농후해지는 가운데, 1945년 2월 하순 미군이 필리핀 마닐라를 점령하였고, 4월에는 오키나와에 상륙하여 일본 본토를 향해 맹렬히 공습을 전개하기에 이르자, 본토의 관문으로서 부산을 포함한 대한해협의 전략상 중요도는 더욱 커졌다. 이에 일제는 미군을 상대로 한 일본 본토에서의 결전과 소련의 침공을 막기 위한 준비를 동시에 해야 했고, 한반도에서도 이 두 가지 방위태세를 함께 수립해야 했다. 이를 위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일본 본토의 방위군과는 별개로 제17방면군을 신설하여 그 작전지역의 경계를 대한해협으로 하고 종전의 조선군사령부를 해체하였다. 서구 지역에서는 대정공원이 병영으로 활용되어 군사훈련과 군마를 사육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구를 비롯한 부산 일원에는 많은 군사시설과 병기고가 있었다. 이곳들은 1945년 9월 16일 미군의 진주와 함께 일제히 무장해제 되었다.(1) 일본인의 부산 진출과 거류지 형성
개항이 되기 전 부산은 한가로운 어촌이었다. 개항이 되기 전 부산포는 배의 항해가 어려울 만큼 해조류가 무성하여 어장으로서 최적의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개항 직전 부산포에는 130여 곳에 어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2천여 어민이 여기에 종사했고, 이 무렵 부산에는 이미 일본인 80여 명이 살고 있었다.(2) 근대적 도시 시설의 집중
서구 지역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강제병합 이후 ‘서부유지’로 지칭된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우선 한국와사전기주식회사(1910년 설립, 1913년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로 개칭, 부평동·토성동) 등 주요 산업시설과 함께 농상무성 우역혈청제조소(1911년, 1918년 ‘조선총독부 수역혈청제조소’로 개칭, 암남동)와 경상남도 수산시험장(1936년, 충무동) 등 공공기관이 설립되었다. 또 송도해수욕장(1913년, 암남동)이 개장한데 이어, 대정공원(1918년, 토성동), 부산공설운동장(1928년, 동대신동) 등 근대적 여가·체육시설과 함께 부산부립병원(1936년, 아미동)과 같은 공공의료기관까지 자리 잡으면서, 1920년대 이후 서구 지역의 도시발전이 크게 진전되었다. 특히 공원과 운동장은 여가 활동과 신체의 단련, 대중 집회의 공간으로 근대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 시설이므로 서구가 행정·문화·주거 중심지로서의 도시기능을 담당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국내 최초의 공설해수욕장인 송도해수욕장은 당시부산의 대표적 근대휴양지였다. 휴게소, 탈의장, 잔교 등의 설비를 갖추었고, 여름철에는 1시간마다 발동기선을 운항하며 부산 시내의 일본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후 남항매축공사로 도로망이 확충되면서 송도와 시내가 더욱 빠르게 연결되었다. 이로 인해 1936년 송도가 부산부로 편입되었고, 지금의 서구 모습이 갖추어졌다.(3) 소외된 조선인 마을
일제강점기 지금의 서구는 일본인들에 의해 ‘신시가지’로 개발된 지역이었다. 서구의 일본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조선인들은 일본인 가옥 주변의 비탈이나 고개로 올라가 터전을 잡았다. 이에 따라, 서구의 거주지역은 시내에서 가까운 토성동, 부민동과 대신동 일대의 평야지대에는 일본인들이, 대신동과 아미동, 남부민동, 초장동 등의 고지대에는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형태로 분리되었다.(4) 전시체제기 동원과 저항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부산은 일제의 대륙진출 관문이자 병참기지로서 군사적 거점이 되었으며,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즈음에는 병력수송과 본토 방어에 있어 주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패전이 농후해지는 가운데, 1945년 2월 하순 미군이 필리핀 마닐라를 점령하였고, 4월에는 오키나와에 상륙하여 일본 본토를 향해 맹렬히 공습을 전개하기에 이르자, 본토의 관문으로서 부산을 포함한 대한해협의 전략상 중요도는 더욱 커졌다. 이에 일제는 미군을 상대로 한 일본 본토에서의 결전과 소련의 침공을 막기 위한 준비를 동시에 해야 했고, 한반도에서도 이 두 가지 방위태세를 함께 수립해야 했다. 이를 위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일본 본토의 방위군과는 별개로 제17방면군을 신설하여 그 작전지역의 경계를 대한해협으로 하고 종전의 조선군사령부를 해체하였다. 서구 지역에서는 대정공원이 병영으로 활용되어 군사훈련과 군마를 사육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구를 비롯한 부산 일원에는 많은 군사시설과 병기고가 있었다. 이곳들은 1945년 9월 16일 미군의 진주와 함께 일제히 무장해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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