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산 산신제는 남부민동의 주민들이 매년 정월대보름 오전 10시~11시 경에 천마산 중턱에서 지역 주민들의 단합과 발전을 위해 산신에게 지내는 노제이다. 이 제는 30여년 전쯤 마을의 단합과 발전을 위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엔 작은 규모로 시작했으나, 지역 유지 및 관변 단체들의 지원이 이어지면서 현재는 300명 정도가 참석하는 큰 제로 발전했다. 제의 주관은 남부민2동 주민자치위원회에서 맡고 있다.
산신제를 지내기 위한 별도의 신당은 없으며, 천마산 조각공원 한편에 돌탑과 제단이 있어 그 제단 위에 제수를 차려놓고 지낸다. 제의 때‘천마산 산왕대신’이라고 쓴 지방을 놓는데, 당수나 제당이 없더라도 지역의 태평 및 풍요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천마산을 신격으로 하는 당산제로 볼 수 있다. 우천 시에는 남부민2동 주민센터에서 제의를 행 한다.
제의 전 제관에게 정해진 특별한 금기는 없다. 다만 제관이 자발적으로 제의 한 달 전 부터 당일까지 혼례나 상례에 참석하지 않거나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 제수 및 제수 비용은 주민위원회에서 준비하며, 제수는 일반 가정의 기제사와 동일하되 돼지머리를 쓴다는 점이 다르다.
제의는 산신제만 지내며, 순서는 유교식 기제사와 동일하다. 제의 당일에는 삼헌관(초헌, 아헌, 종헌) 외에도 참석한 지역 유지들 모두에게 제관 복장을 입혀 술을 올리도록 한다. 제의가 끝나면 지방과 축문을 태워 액운을 없애고, 음복은 참석한 사람 모두가 한다.
남부민2동 천마산로 85, 환희정사(구 천왕사) 서쪽에는 천마산 산신당이 있다. 당산신의 이름은 당산할배인데, 환희정사에서는 허공산신할아버지라고 말한다. 당산의 역사나 제당의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천왕사 때부터 모셔오던 당산으로, 9년 전 환희정사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당산과 당산제는 절에서 관리하고 있다.
제당은 천마산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연면적은 약 12㎡이다. 지붕에는 슬래브를 얹었고 제단 뒤쪽은 전면이 바위이며 앞은 트여 있다. 제단에는 위패나 신도가 없고, 국기(태극기, 성조기, 일장기, 오성홍기, 삼색기)가 들어 있는 유리상자가 바위 위 별도의 시멘트 단 위에 놓여 있다. 그 아래 향로와 제기가 놓여 있고, 왼편에는 촛대가 오른편에는 복전함이 있다.
제의는 음력 3월 16일 낮 12시에 지낸다. 3월 16일에 지내는 것은 그 날이 산신의 생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관은 환희정사의 스님이며, 제수는 과일 다섯 가지와 떡, 생야채(미나리, 당근, 오이)읽는다. 음복은 참여한 사람끼리 나눠 먹는다.
충무대로 145번길 16에는 남산 고당 할매당산이 있다. 제당의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남부민동 해안을 매축할 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처음 제당을 세웠던 것이 현재에 이르렀다고 한다.
제당은 대지 15㎡에 연면적 4.6㎡이며 북쪽으로 세워져 있다. 나무판자로 된 제단 위에는 위패는 없고 용을 대동한 할매도가 걸려 있다. 할매도의 왼쪽 아래에 봉안일 임자 11월 27일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 외에 왼쪽 벽에 분홍색 인조 한복 한 벌, 흰 색 인조 한복 한 벌, 색동 동자복 한 벌과 버선 두 켤레가 걸려 있다. 주위에는 높이 155㎝의 블록담장이 둘러 있으며, 담장의 대문은 서쪽으로 나있고 여닫이 외짝 알루미늄 새시로 되어있다. 현재는 제당 입구의 왼쪽 벽이 반쯤 허물어져 있어 복구가 필요한 상태이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고당할매가 영험하다고 알려져 무속인들이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제의는 음력 9월 9일 아침 10시 경에 지낸다. 제관은 무속인이며 마을 사람들의 동의하에, 매년 고정적으로 제의를 맡아오고 있다. 제수는 술·과일·포, 밥, 국이고 준비하는 비용은 무속인이 전담한다. 제의 절차는 술을 올리고 절을 하지 않고, 음식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린다.
동대신1동 할배당산은 낙서암 위에 위치하며, 음력 정월 14일 자정에 제를 지내고 있다. 당산제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제당은 100여 년 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원래 낙서암 보살이 당산제를 주관했으나, 개인사정으로 인해 1975년 무렵 무속인에게 제의를 맡겼고, 이후 당산 토지가 사유지가 되면서 주인인 최경두 씨가 40여 년간 맡 아오고 있다.
제당은 서서북쪽으로 세워져 있으며, 대지 330㎡, 연면적 5.8㎡의 시멘트 건물이다. 지붕과 문은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문은 여닫이 외짝 철문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직사각형 시멘트 제단 위에 위패는 없고 쌀을 담아 놓은 그릇 1개, 정화수 그릇 3개, 술잔 2개, 촛대 8개, 향로 1개가 얹혀 있다. 제단 뒤 벽에는 산신도가 유리 액자 속에 들어 있다. 오른쪽 벽 아래에는 북과 징이 1개씩 있고, 왼쪽 벽에는 할배 옷 1벌, 할매 옷 1벌이 걸려 있다. 제당 뒤에는 흉고 둘레 217㎝의 팽나무가 서 있고, 그 뒤에 미륵바위(병풍 바위)가 있다.
제주는 제의를 지내기 전 7일간 금기를 지켜 출산, 혼사, 초상 등이 행해지는 곳에는 출입하지 않고, 부부 간의 잠자리도 피한다. 제의 보름 전에는 금줄을 치고 부정을 막는다. 제물의 종류와 제물 진설 및 제의 절차는 일반 가정의 기제사와 같다. 제의는 본래 당산제 다음에 목신제의 순서로 지냈는데 최근에는 합사하여 지낸다. 축문은 제주가 읊은 다음 소각을 한다. 제의가 끝난 뒤에는 제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여 음복한다.
북산리 당산은 북산리 경로당 뒤편 산록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할배당산이라고 부른다. 200여 년 전부터 기와 맞배지붕으로 된 제당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당산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제당은 1970년대에 헐리고, 1991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되었다.
제관은 원래 마을 사람들 중에서 돌아가며 맡았으나, 38년 전부터 김명균 씨가 제당을 관리하고 제의를 주재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김명균 씨가 북산리에 이사를 온 후 마을 사람들 20여 명이 죽는 흉사가 이어졌다. 마을에서는 그 원인을 당산제를 잘못 지냈기 때문이라 보고 김명균 씨에게 제의를 부탁했다고 한다. 김명균 씨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그가 제의를 주관하면서 제의 날짜와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옛날에는 대보름을 맞아 14일 자정에 제의를 지냈으나, 지금은 정월 3일에서 5일 사이에 택일하여 오후 10시~11시 무렵에 지낸다. 제관은 제의 5일 전부터 육식을 하지 않으며, 제의 전에는 목욕재계를 한다. 산신제 없이 당산제만 치르며, 정수사 뒤의 쌍샘에 금줄을 치고 촛불을 켜둔다. 제수는 술, 돼지머리, 삼색 과일, 명태로 하며 이전에는 밥과 국을 했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다.
당산제는 불교식으로 간단히 지내고 주로 기도를 드리는 것에 정성을 다한다. 제의 후 과일류는 산짐승들이 먹도록 제당 밖에 내어 두고, 나머지 음식은 북산리 노인정에서 마을 사람들과 같이 음복한다.
제당은 1.3㎡으로 남남서쪽으로 세워져 있다. 제당 안에는 정화수 그릇 1개, 향로 1개, 촛대 4개 등이 있다. 제단 중앙에 산신령을 그린 산신도가 가로 눕혀져 있고, 오른쪽에는 무당들이 사용 후 두고 간 부채가 신문지에 싸여 있다. 제당 뒤에는 당산 나무인 벚나무가 있으며, 제당 앞 아래쪽에 돌탑이 여러 개 있다. 제당 아래쪽에「금강다라니경」을 넣은 여러 개의 돌탑을 쌓아 두고 있다. 제당에는 무속인들이 수시로 찾아와 공을 드린다고 한다.
영령당산은 망양로 174번길 4,‘닥밭골 행복마을’내의 초현경로당을 마주보고 위치하고 있다. 당산보존회에 따르면 1453년 3월 3일에 영령당산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77년에 현재의 위치에 제당을 재건축하였으며, 1990년 7월 2일에는 영령당산 신위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령당산 신위/ 이 기념비는 우리 동리가 생겨 살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들의
조상 대대로 섬기면서 빌고 빌던 민족의 신앙이며 토착 수호신으로 모셔왔습니다.
앞으로도 영원무궁토록 역사와 함께 명맥을 같이 하시면서 무지한 우리들의 동리
모두를 위하시어 자손 대대로 보살펴 주시고 밝은 빛이 되옵시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오직 당산 할아버님의 높으신 은덕을 기리면서
정성 모아 백배손 모아 비나이다./ 당산비 건립일 경오년 윤임오월
무진일(庚午年潤壬午月戊辰日)/ 단기 4323년 7월 2일 음력 윤 5월 10일/ 당
산보존회 일동 후원 동대신2동사무소/ 당산지번 동대신2동 87-54번지”
제당은 대지 59㎡에 연면적 8㎡으로, 서서남쪽으로 세워져 있다. 시멘트 제단에는 위패 없이 산신도만 걸려 있는데, 산신도는 산신령이 좌우로 호랑이를 대동한 그림이다. 마을 노인들에 따르면 이 호랑이들은 보수산 쪽에 산불이 났을 때 살아남은 호랑이라 당산에 모시고 있다고 한다. 제단 위에는 정화수 그릇 1개, 술잔 2개, 향로 1개, 촛대 4개 등이 얹혀 있고, 오른쪽에 당산할매도 액자가 세워져 있다. 왼쪽 벽에는 할매 옷 1벌, 아기 색동옷 1벌이 걸려 있고, 오른쪽 벽에는 갓과 할배 옷 1벌이 걸려 있으며, 찬조금 명부가 붙어 있다. 주위에는 80여 년 된 소나무 5그루가 있고, 담장의 문은 여닫이 외짝 철문이 동쪽으로 나 있다.
당산제는 대한 보수는 없다. 제주는 제의 전 3일부터 제의 후 1주일 간 금기를 지켜 출산·혼사·초상 등이 행해지는 곳에는 출입하지 않고, 부부 간의 잠자리도 피한다. 제의 당일 제관은 목욕재계하고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엄숙하게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당산보존회 회원들도 전원 참석한다. 제수는 일반 가정의 기제사와 같으며, 초현경로당의 할머니 몇 분이 장만한다. 제수 비용은 보존회 회원들이 갹출하여 마련한다.
제의는 산신제와 당산할매제를 합사하여 지낸다. 제의 순서는 가정의 기제사와 같으며 당산보존회 총무가 축문을 읊은 후 소각한다. 제의가 끝나면 보름날 아침 초현경로당에서 마을 노인들이 음복한다.
2014년부터는 10월에 행해지는‘닥밭골 행복마을 축제’에서 행사 시작 전에 주민들이 마을 수호신에게 감사하는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노인들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의 당산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봄가을 야유회나 타지 생활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당산에 먼저 고하며, 일이 무탈하게 끝났을 때는 당산 신의 보살핌으로 생각한다.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나 무속인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리는 경우도 있다.
시약산 산제당(山祭堂)은 1860년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의 여동생이 세웠다고 전한다. 1978년에 제당을 중수했고, 2013년 지역이 개발되면서 이전 건물을 없애고 현재의 제당을 다시 지었다.‘서대신3동 운영위원회’의「시약산 산제당 약사(略史)」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본당은 단군기원 4193년 서기 1860년 이조 개국 469년 철종 11년 초여름에
축조되었는데, 간신히 비바람을 피할 정도의 석실토벽(石室土壁)의 산신당이었다.
전래에 따르면, 당시 진양에 거주하던 최씨라는 여인이 홀로 치성드릴 곳을
찾아다니던 중, 이곳 부산으로 들어와 시약산을 둘러보고 마음 속으로 정하고
입산하여 목욕재계하고 9일 밤낮을 음식을 끊고 성심성의로 기도한 끝에, 산신
령의 현몽으로 이 지점을 점지 받아 몸소 제단을 설치하고 평생을 전념전심 기
도드리던 기도지이다. 차츰 세상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최 여인은 본시 수운대
사 최제우(초명 최복술)선생과 남매간으로 진양 태생이다. (중략) 세월이 흘러
감에 친가의 조카뻘 되는 최씨(이름 미상)와 그의 부인(진양 하씨) 내외가 고모
최 여인의 노경보우(老境保佑)를 위해 찾아와 곁에서 모시다가 고모의 치성에
감동하여 유지를 계승코자 영도 고갈산(枯渴山, 봉래산) 기슭에 별도로 제당을지어
지극히 치성을 닦았는데, 이 또한 통령신명(通靈神明)함에 주민들이 하씨
신당(河氏神堂)이라 칭하고 지금도 지성영소(至誠靈所)로 받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이 세상에 밝혀짐에 따라 원근 이웃 주민들의 숭앙을 받아오던 최
씨 여인이 명을 다하고 영면(永眠)하심에 서부민이 자진 합력하여 산신당을 개
축 건립하여‘시약산 산제당’으로 이름 짓고, 세 분의 영정(萬德高勝至靈至聖慈
護主殿大聖神(水雲大師幀), 昭明至靈大慈坤殿裕靖大聖神(水雲大師閤夫人晉陽
河氏幀), 彰德仁烈昭明至聖大慈王姑母淑靖大聖神(崔氏女人幀))을 같이 봉안하
여 가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며 또한 본동의 건민안태(建民安泰)를 위한 산신제
와 함께 선현들이 창건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년 행사로 시향제(時享祭)를
모셔오며 본 유산을 시의적절하게 개축 또는 중수하여 보전에 만전을 기해오는
바이다. 우리들 또한 마땅히 본 동에 삶을 가질 때는 조상들의 미풍양속의 유지
를 이어받아 보전관리에 힘쓰다 후생(後生)에게 이어줌이 책임이며 도리일까 한다.”
제당 건물은 맞배지붕에 한 칸 건물로 출입문 위에 산신각(山神閣)이라는 명판이 걸려있다. 제당 안 제단 위에는 세 사람의 영정이 액자 속에 들어 있는데, 왼쪽으로부터 최제우 여동생, 최제우, 최제우 부인 순서이다. 이 영정의 제작 연도는 180~2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최제우 영정은 호랑이를 대동한 산신상이며, 여동생은 부채를, 부인은 서책을 들고 좌정해 있는 모습이다. 제단 위 가운데에는 호랑이를 타고 앉은 산신상이 놓여 있고, 그 왼편에 나반존자의 조상이 있다. 제단 왼편에는 1978년 제당을 중수할 당시 찬조한 분들의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제당은 별도의 담이 없고, 도로와 직면해 있다. 개축 이후에는 당산제를 지내지 못하고 있어 이전 당산이 허물어진 때를 기점으로 근 5년간 당산제의 맥이 끊긴 상태이다. 현재는 천룡사 주지 원혜 스님이 당산 내 세 영정 앞에 공양만 올리고 있다. 제당은 천룡사 오른쪽 아래에 위치하며, 전체적으로 천룡사의 부속 건물 같은 인상을 준다.
제의는 이전에는 음력 정월 14일 자정에 지냈는데, 서대신3동 시약산 산제당 운영위원회에서 제주를 선정하여 제사를 모셨다. 2006년에 서대신동이 재개발 구역으로 확정됨에 따라 운영위원회가 해체되면서, 동네 부인(보살)들이 합심하여 제사를 올렸다. 제수 비용은 신당에 개인 치성을 하러 와서 내어놓는 시주금으로 마련하고, 제물은 부평동 시장에 가서 구입했다. 절차는 세 분의 영정 앞에 밥과 국(무·두부·오징어를 넣어 끓인 탕)을 각각 차리고 나머지 제물은 맨 앞줄에 대추·밤·배·감·사과·바나나·수박·참외를 놓는데, 10월이라도 수운이 수박과 참외를 좋아했기 때문에 꼭 올렸다고 한다. 둘째 줄에는 조기구이·민어구이·돼지머리·꽃게맛살부침·고사리나물·콩나물·도라지나물 등을 놓았 다. 그리고 떡으로는 흰시루떡·팥시루떡·콩시루떡을 제상에 놓았다. 제의 절차는 유교식 기제사와 같으며, 최제우와 그 부인 및 누이를 위한 소지(燒紙)를 한 장 올리고 나면, 참례자들이 각자 소지를 올렸다.
구덕령 꽃마을 당산은 서구 서대신4동 꽃마을의 아래쪽 산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제당에는 당산할배와 당산할매를 모시고 있다. 제당은 1966년 음력 8월 12일에 건립되었다. 원래 할매제당과 할배제당이 따로 있었으나, 제5공화국(1981~1987) 때에 할배제당을 철거한 후, 그 터에 마을의 공중변소를 건립하였다. 이후에 마을 청소년들이 죽는 일이 생기고, 당산할배가 노인들에게 현몽하여 제당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하자, 할매제당에 합사하게 되었다. 당산할배가 꿈에 나타나 할매 곁으로 안 가겠다고 하였지만, 달래어 함께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 중에는 합사가 여전히 성사되지 못해 당산할배는 할매당에 없다고 보는 분들도 있다.
꽃마을 당산은 대지 29.5㎡, 연면적 8㎡이며 동쪽으로 세워져 있다. 제당 내부의 시멘트 제단에는 붉은 천이 덮여 있고, 제단 위에는 향로와 제기가 놓여 있다. 제단 윗벽 오른쪽에 당산할매도, 왼쪽에 산신도가 붙어 있다. 제단의 왼쪽에는 남자한복 한 벌과 아이 한복 두 벌, 오른쪽에는 여자 한복 두 벌이 걸려 있다. 제당 뒤에는 큰 바위가 담을 겸하고 있는데, 제당 오른편에 튀어나온 바위를 미륵바위라고 한다. 미륵바위 앞에는 벽돌에 대리석 판을 얹은 제단이 있고, 제단 위에는 향로와 정화수 그릇이 놓여 있다. 제당 양 옆과 앞쪽에는 돌 축대 위에 185㎝ 높이의 블록 담을 쌓아 두었다. 담장의 동쪽에 철문이 있고, 주위에는 잡목들이 무성하다. 대문 앞으로 3m 되는 지점에 우물이 있는데 용왕당이라고 칭한다.
제당 뒤 도보 3분 거리에 있는 구덕령의 탑거리에는 돌탑과 당산목이 있다. 이곳은 이전에 당산나무가 있던 자리로 당산나무가 고사한 후, 5년 전에 마을 청년회가 주축이 되어 돌탑을 만들고 새로운 당산나무로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 이전에는 당산제를 음력 정월 대보름 새벽 4시 무렵에 지냈다. 마을에서 나이가 많고 깨끗한 주민을 제관으로 선정하여 제를 지냈는데, 제관의 집에는 제의 일주일 전부터 금줄을 쳐서 출입을 금했고, 제관은 이때부터 제의가 끝나고 보름 뒤까지 금기를 지켰다.
금기는 담배도 끊고 집안에 아기 낳은 며느리도 친정에 보낼 만큼 엄격했다고 한다. 제의 당일에는 우물을 치고 거기에 금줄을 달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 후 그 물로 제수를 장만했다. 20년 전부터는 마을 내 절인 수도사에 맡겨 스님의 주관 하에 제의를 지냈는데, 제당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자 7년 전부터 마을 청년회에서 당산 관리를 맡아 제의를 지내고 있다.
당산할배를 합사하기 이전에는 당산할배제를 먼저 지내고 당산할매제를 지냈다. 합사후에는 양위를 함께 모셔 동시에 제를 치렀고, 제물 종류, 진설 방식은 유교식으로 했다. 이후 절에서 제의를 맡게 되면서 제의 절차에 불교적 성격이 강해졌다. 제의는 음력 9월 9일 오전 10시에 시작해서 오후 3시쯤에 마친다. 먼저 당산제 전날 정오에서 오후 2시까지 탑거리의 당산목과 돌탑 앞에 음식을 진설하고 무속인들이 굿을한다. 이때 음식은 술·과일·포, 떡, 돼지고기(날 것), 밥, 국, 전 등을 푸짐하게 차리며, 무속인들은 북과 쇠를 두드리며 굿판을 벌인다. 당산제 당일에는 전날보다 더 많은 양의 음식을 장만하고 여기에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준비한다. 당산할매가 찹쌀떡을 좋아한다고 해서 떡상자 채로 차린다. 제수는 제당 안 제단 위, 미륵바위 앞, 대문 앞, 용왕당 앞에 진설하는데, 통돼지는 미륵바위 앞에 놓는다. 제의가 시작되면 먼저 제당 안 당산할매에게 인사한 후, 미륵바위 앞에서 북과 쇠를 두드리며 굿을 한다. 이때 주무는 대를 잡고 신내림을 하는데, 신이 내리면 마을의 안녕과 각 가정의 무사를 기원하는 공수를 한다.
굿의 마지막에는 돼지를 세워서 희생으로 바친다. 제수 비용은 마을 주민들의 찬조금으로 충당하고 있으며, 당산제 참석 인원은 30여 명 정도이며, 음식은 참석한 사람들이 나눠서 가져간다.
아미동 까치골 당산은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할배와 당산할매를 모시고 있다. 제당은 1930년에 건립된[庚午年六月初五日] 것으로 까치고개 오른쪽 마을 뒷산의 아미기도암 내에 있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당산을 관리하고 제를 지냈으나, 2016년 현재는 아미기도암에서 당산제를 주관한다.
당산은 대지 68.7㎡에 연면적 5㎡으로 서쪽으로 세워져 있다. 제당은 기와 맞배지붕 아래 돌벽에 시멘트로 마감하였고, 출입문은 여닫이 두 짝 나무문에 태극 도형이 그려져 있다. 제단은 나무 제단에 무지개 색 천을 덮어놓았고, 그 위에‘아미산/ 산왕대신(峨嵋山/ 山王大神)’이라고 쓴 지방이 붙어 있는 위패가 있다. 위패 뒤로 산신도와 당산도가 액자에 담겨 세워져 있다. 제단 위에는 그 외에 쌀을 담아 놓은 그릇, 정화수 그릇, 술잔, 향로, 촛대, 조화 등이 놓여 있다. 제당의 왼쪽 벽면에는 갓 1개와 할배 옷 1벌, 동자옷 1벌이 걸려 있으며, 오른쪽 벽면에는‘당산중건설판자 명단’의 나무판이 걸려 있다. 제당은 블록 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담장 안에는 소나무, 벚나무, 사철나무가 심어져 있다.
당산제의 날짜와 시간 및 제수는 제의 전 스님의 선몽으로 정하는데, 대체로 음력 정월보름 새벽에 지낸다. 제수는 돼지 한 마리와 과일, 떡, 밥, 국 등을 올린다. 돼지는 날 것을 한 마리 올리고, 때에 따라 삶은 것도 올리는데 이는 선몽으로 결정한다. 제수 비용은 절에서 전담하며, 당산제 당일에 참석한 마을 주민들이 찬조금을 낸다.
제의 절차는 산신제나 용왕제 없이 당산할배제만 지내며, 불교식으로 스님이 경을 읽는다. 당산제를 모신 후에는 참석자들이 함께 모여 음복한 후 경로당에 가져가 먹는다.
대두산 당산은 관음사 뒤편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당산할배, 당산할매, 서낭할매 세 신을 모시고 있다. 당산신의 신격과 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마을주민들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것으로 믿고 있다. 관음사 보살 유성업(81세) 씨가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대두산 당산은 아미동의 당산 중에 제일 오래되었으며, 다른 당산들이 만들어질 때 이곳의 흙을 가져가서 지었다고 한다.
당산은 대지 77㎡, 연면적 9.5㎡이며, 남남서향으로 세워져 있다. 제당은 1989년에 건립된 것으로, 당사 안에는 시멘트로 만든 직사각형의 제단이 있고, 제단 위에는 위패 판에‘대두산주당신위(大頭山主堂神位)’라 쓴 위패가 들어 있다. 위패 위에는 산신도가 액자에 담겨 벽에 걸려 있다. 그 외 정화수 그릇, 술잔, 향로, 촛대 등이 제단에 놓여 있다. 제당 안 왼쪽 벽면에는 당산할배와 당산할매 한복 한 벌씩과 남녀 어린이 한복이 각 한벌씩 걸려 있다. 제당 주위에는 수령이 50~60년으로 추정되는 소나무가 5그루 있는데, 이 중 제당 앞에 있는 소나무(흉고 둘레 160㎝, 수령 100여 년)가 서낭할매의 신체이다.
당산제는 음력 정월 14일 자정 무렵에 지낸다. 제관은 이전에는 마을 통장들이 돌아가며 지냈으나, 82년 이후 관음사에서 맡았고, 다음으로 박수영 씨와 마을 통장 등이 번갈아 맡았다. 금기 기간은 정월부터 당산제 당일까지 15일가량이며, 3일 전부터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린다. 당산제에 올리는 제물의 종류와 차림 방식은 일반 가정의 기제사와 동일한데, 다만 돼지머리와 동자신을 위한 사탕과 과자를 준비하는 것이 다르다. 제수 비용은 통장이 마을 사람들에게 거둬서 충당하고 있다.
제물을 차린 다음에는 산신제를 따로 지내지 않고 제당 안에서 당산할배, 당산할매 순으로 당산제를 지낸다. 당산제를 지낸 후에는 제당 소나무 앞에 간단한 제물만 차려서서 낭할매제를 지낸다. 제의 말미에 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축원을 외며 소지를 올린다. 이때 소지한 재가 하늘 높이 보기 좋게 오르면 그해의 운수가 길할 것으로 여기며, 그렇지 않고 재가 아래로 뚝 떨어지면 그해 운수는 흉할 것으로 속신한다.
제의가 끝난 후에는 제물을 통장 집으로 가져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음복한다. 당산제 의 제물은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어 음복 시 가정에 길흉사나 기타 부정이 있는 이는 음복 하지 않는다. 당산제를 지낸 후에는 달리 부대 행사를 하지 않는다.
아미동 산신당은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할매와 당산할배를 모시고 있는 당산으로 아미초등학교 근처에 있다. 아미동은 1907년에 복병산에 있던 일본인 묘지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일본인 공동묘지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이후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온 이들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공동묘지 위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산신당 당산제 또한 그 즈음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이 따로 있었는데, 할머니 당산 자리에 다른 건물이 들어서면서 합사하게 되었다.
제당은 1993년에 보수하였는데, 제당 안에 걸려 있는「본신당 보수 취지문(本神堂補修趣旨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축 후(新築後) 세구년심(歲久年深)으로 풍우(風雨)에 감내(堪耐)치 못하여
후폐(朽廢)될 직면(直面)에 봉착(逢着)함으로 본 경로회(本敬老會)에서 좌시(坐
視)할 수 없어 수년간(數年間) 보수사(補修事)에 고심(苦心)하든 바 당시(當時)
1,2동민(一二洞民)의 협조(協助)와 아울러 경로회장(敬老會長) 손수갑(孫守甲),
부회장(副會長) 운고(雲皐) 박길영(朴吉榮) 열성(熱誠)으로 재무(財務) 최성업(崔
聖業) 외(外) 간부(幹部)로 위시(爲始)하여 본당(本堂) 유지제현(有志諸賢)게 찬
조금(贊助金) 희사(喜捨)에 의거(依據)하야 보수(補修)하게 되었습니다. 본 경로
회에서 고금(古今)으로 전 동민(全洞民)의 협조 하(協助下)에 매년(每年) 음 정월
15일 향제(陰正月十五日 享祭) 중(中) 서기 1972년 4월 16일부(西紀一九七二年
四月十六日付)로 부산시장(釜山市長)으로부터 문화재(文化財)로 간주(看做)됨에
따라 가일층(加一層) 경중(敬重)하여 왔습니다. 전 동민은 영구보존(永久保存)하
심을 바랍니다.”
산신당의 제관은 옛날에는 마을에서 선정했으나, 1998년 무렵부터는 대성사의 보살 김귀엽 씨가 주관해 오다가 2010년부터는 다시 아미동 주민자치위원회에서 맡아서 지내고 있다.
제당은 대지 52.5㎡에 연면적 14.5㎡이며, 북북동향으로 세워져 있다. 벽은 블록에 시멘트로 마감하였고 문은 여닫이 두 짝 나무문이다. 제당 안에는 시멘트로 만든 큰 제단과 그 앞에 향로단이 있다. 큰 제단 위에는 시멘트로 만든 2개의 위패가 있는데, 붉은 페인트로 왼쪽에‘아미제당신위(峨嵋祭堂神位)’, 오른쪽에‘아미제당비신위(峨嵋祭堂妣神 位)’라고 써 놓았다. 위패 뒤에는 미륵바위가 신체로 있고, 바위 위쪽에는 산신도가 붙어있다. 오른쪽 벽에는‘아미동신사중수방명(峨嵋洞神社重修芳名)이 2개 걸려 있고, 왼쪽벽에도 1976년 5월 10일에 아미경로회에서 쓴‘본신당보수취지문(本神堂補修趣旨文)’ 의 현판, 1993년 6월 10일~1994년 5월 20일에 만든‘보수공사 협조인 및 금액’현판, 날짜 미상의‘아미동 산신당보수공사 기증자방명’현판 3개가 걸려 있다.
제당 좌우에 벚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고, 블록 담장이 직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제당 입구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진 여닫이 두 짝 나무문 위에‘아미동산신당(峨嵋洞山神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2015년에 아미동 주민들은 산신당을 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구청에 신청했으나, 여건이 맞지 않아 진행이 어려운 상황이다. 제의는 음력 정월보름날 오전 10시경에 지낸다. 이전에는 정월 14일 밤 자정에 지냈으나, 주민들의 참석이 저조하여 2015년부터는 15일 낮으로 옮겼다. 제관이라는 명칭은 별도로 쓰지 않고 정해진 금기도 없다. 초헌은 아미동장이 올린다.
제수는 돼지머리, 떡, 과일, 포 등이며 밥과 탕이며, 이전에는 준비해 주는 사람이 있어 올렸지만 지금은 올리지 않는다. 제수 비용은 제의 때의 찬조금으로 충당하며, 제의는 유교식 기제사와 동일한 순서로 지낸다.
이전에는 제의 후에 음식을 주민센터에 갖다놓고 다음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음복하고 단합대회를 가졌다. 현재는 제의 시간을 낮으로 옮기면서 제의 후 아미농악단이 한 차례 풍물굿을 한 후 제당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음복한다. 이후 모두 송도달집태우기에 참석 한다.
아미동 산제당은 대성사 왼쪽 아래 50m 떨어진 산기슭에 위치해 있는 당산으로, 산신할배와 산신할매를 모시고 있다. 당산제의 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마을이 한국전쟁 후 피란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점을 고려할 때, 마을 당산의 전통 또한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산제당은 대성사의 김귀엽 보살이 1962년에 보수하여 당산제를 지내오고 있다.
김귀엽 씨가 당산제를 지내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그의 나이 26세 되던 해 범어사에 놀러 갔다가 내려오던 중 다리를 다쳐 걷지를 못했다. 여러 방법을 써도 낫지 않았는데 당시 다리에 침을 놔주던 할머니가 산신할배에게 빌면 나을 거라고 했고, 실제 산신할배에게 치성을 드린 후 다리가 나았다. 그래서 감사의 뜻으로 당시 무너지다시피 한 당산을 수리해서 당산제를 지내게 됐다. 산신할배와 산신할매를 합사하게 된 계기는 김귀엽씨의 선몽 때문이다. 그 즈음 김귀엽 씨의 꿈에 산신할배가 나타나 장가를 보내달라고 했다. 건너 당산 위에 돌이 있는데 그 위에 할매가 앉아 있다는 것이다. 당산신의 혼례는 산사람처럼 치렀는데, 조그마한 가마를 만들어 혼을 모셔다 당산에서 혼례식을 올렸다. 지금 당산 안의 정면에 있는 당산할배와 당산할매 내외의 탱화도 그때 그려 넣었다.
현재 산신 제당은 대성사에서 수년 전에 보수 수리한 건물이다. 제당은 44.9㎡의 시멘트 축대 위에 지었는데, 연면적은 약 6.6㎡이며 동쪽으로 세워져 있다. 제당 안에는 시멘트로 만든 제단이 있고 그 위에 위패, 정화수 그릇, 향로, 촛대가 놓여 있다. 위패에는;‘부산시 서구 아미동 2가(釜山市 西區 峨嵋洞 2街)/ 산제당 양외분령(山祭堂 兩外分靈)’이라 쓴 지방이 붙어 있다. 제단 뒤 벽면에는 산신도(나무를 중심으로 산신할배와 산신할매가 정면을 향해 앉은 형상)가 붙어 있다. 제단 왼편에 남자와 여자 고무신이 놓여 있고, 제당의 왼쪽 벽에는 할배 옷 1벌, 할매 옷 1벌이 걸려 있다. 제당은 블록 담장으로 둘러져 있는데, 담장 안에는 사철나무, 소나무, 벚나무가 있으며 제당 뒤에는 잡목이 우거져 있다.
당산제는 음력 1월 14일 밤 11시에 지낸다. 제주는 원래 마을 사람 중에 선정했으나, 김귀엽 씨가 맡은 이후에는 대성사 스님이 주관하고 있다. 아미동에서는 대성사 아래의 ‘아미동산제당’을‘작은 당산’, 아미초등학교 근처의‘아미동산신당’을‘큰 당산’이라고 부른다. 2009년까지 김귀엽 씨가 두 당산의 제의를 모두 주관했으나, 현재는 작은 당산의 제의만 전담하고 있다.
당산제에 올리는 제물의 종류는 일반 가정의 기제사와 대동소이하나, 돼지머리와 시루떡을 시루 채 올린다는 점이 다르다. 제수 비용은 대성사에서 전담하고 있다.
당산제의 제의 방식은 예전에는 유교식 엄숙형으로 행했으나, 근래에는 유교식으로 하되 축문 대신『당산경』을 왼다. 그리고 제의 말미에 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번창을 기원하며 소지를 올린다. 순서는 제당에 모신 신을 위한 소지부터 먼저 올린 후 마을 주민 순으로 행한다. 소지를 올릴 때에는 각기 축원하는 이령수(신(神)에게 말로 읊조리면서 소원을 비는 행위)를 한다. 이때 소지한 재가 하늘 높이 보기 좋게 오르면 그해는 운수가 길할 것으로 여기며, 만약 재가 아래로 뚝 떨어지면 그해 운수는 흉할 것으로 속신한다. 제의를 마친 뒤에는 제물의 일부를 떼어 내어 제당 밖에서 잡귀 잡신을 풀어먹이는 시석을 행한다. 제의를 모두 마친 후 음식은 마을 통장이 인근 경로당으로 가져가 주민들과 함께 음복한다.
천마산 산제당은 천룡사 뒤편 천마산 산정 밑에 있는 당산으로, 당산할배, 당산할매, 칠성신, 미륵신, 용왕신을 모시고 있다. 당산의 연원이나 제당의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현재 이곳에서 제를 주관하는 무속인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옛날에는 기와로 된 제당이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 당산을 뜯어버렸고, 이후 동네가 시끄러워 다시 제당을 짓고 관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당산을 관리할 때는 별도로 제관을 정하고 제수를 마련하여 정월대보름에 제의를 행했다. 20년 전부터 할머니가 전담하면서 제의 날짜와 방식이 바뀌었다. 제의는 주관자의 성향과 관련하여 불교적이면서 무속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미륵바위에 기도하면 자식을 얻는다고 해서 지금도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당산할배당의 연면적은 8.2㎡으로 동동북쪽으로 세워져 있다. 제단은 슬래브 형으로 제단 밑에는 미닫이 두 짝 유리문이 있고 그 안에 제구가 들어 있다. 위패는 없고 제단 위벽에 왼편으로부터 오방신장도, 산신도, 당산할매도가 걸려 있다. 제단 위에는 정화수 그릇 셋, 촛대 넷, 향로 1개가 놓여 있다. 제단 오른편에 남자 한복이 네 벌 걸려 있는데, 산신할아버지, 산신할머니, 당산할배, 당산할매의 옷이다.
당산할배당 오른쪽 아래로 당산목이 있는데, 그 바로 옆 우물이 용왕당이다. 우물 오른편으로 미륵바위가 세워진 미륵당이 있다. 과거에는 미륵바위 아래에 할매당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그래도 이 터를 할매당이라고 칭하고 그 아래 터를 장군당이라고 한다. 당산할배당 왼편에는 블록 위에 촛불을 켜 두고 옆에 정화수를 떠 놓았는데, 옛날 이곳에 길이 있을 때는 칠성단이 있었다고 한다.
제의 날짜는 무속인 할머니의 선몽으로 정하는데, 대략 음력 10월 6일쯤이며 새벽 1시에 지낸다. 할머니는 제를 지내기 3일 전부터 당산에 와서 기도를 드린다. 이전에는 제의전에 황토를 놓고 금줄을 치고 숯과 고추를 꽂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마음으로정성만 드린다.
제수는 일반 가정의 기제사와 같은데 당산할배당의 제수는 별도로 진설하지만, 그 외 당산할매당, 장군당, 용왕당, 미륵당의 제수는 당산나무 앞 빈 터에 공동으로 진설한다. 이때 밥은 솥 채로, 떡과 과일은 박스 채로 올린다. 이전에는 돼지머리를 했으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제수 비용은 할머니 본인이 마련하고 일부는 이곳에 기도드리러 오는 사람들이 찬조한 돈으로 한다.
제의는 불교식으로 지낸다. 경은 부정경, 천수경, 당산경을 하는데, 외우기도 하고 책을 보고 하기도 한다. 소지는 제주 본인은 올리지 않지만, 참석한 사람들은 하기도 한다.
제의 후 음복은 참석한 사람들과 같이 하는데, 참석한 사람들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 자주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 당산제 전날부터 모인다. 일부는 음식을 싸가기도 한다.
암남동 산신제는 암남동의 주민들이 매년 정월대보름 오전 10시~ 11시 경에 장군산에서 지역 주민의 소원성취와 지역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며 산신에게 지내는 노제이다.
산신제를 주관하는 암남동 통장협의회의 박재화(1959년생, 암남동) 씨에 따르면 이 제의는 윗대부터 시작하여 계속하여 지내고 있다고 한다. 1948년 경부터 암남동 80-1번지에 소재한 산신당에서 주민들의 평안과 바다 고기잡이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취지에서 관내 유지들의 성금으로 산신제를 지내오다, 1989년 경부터 통장협의회에서 주관하고 있다.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시 경관이 바뀌면서 10년 전부터 현재의 장소(장군산 일원)로 옮겨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바닷가 마을인 까닭에 산신제와 바다풍속제를 함께 지냈는데 현재는 산신제만 지내고 있다. 암남동 통장협의회가 산신제를 주관하며, 송도관광번영회에서 주최한다. 산신제에는 서구청장과 지역 유지, 마을 주민들이 참가하고 있다. 산신제를 지내기 위한 별도의 신당은 없다.
암남동 산신제의 제관은 현재(2016년) 김수성 씨가 맡고 있으며, 암남동 동장과 통장협의회 회장, 송도관광번영회 회장 세 사람이 삼헌관을 맡는다. 제수는 통장협의회의 여성 회원들이 마련하고 있으며, 제수 준비에 들어가는 비용은 송도관광번영회에서 마련하고 있다. 제수는 일반 가정의 기제사와 같고, 제의 순서는 유교식 기제사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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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수정일 : 2021-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