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
918년 건국된 고려는 935년에 신라가 투항하고 936년에 후백제가 멸망하면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가 수도를 개경에 둠에 따라 한반도 동남에 위치한 부산은 자연스레 정치 중심에서 먼 지역이 되었다.
후삼국의 혼란을 통일한 고려는 중앙 정치제도의 정비와 함께 각 지역을 다스리기 위한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였다. 고려의 군현제는 전국을 일원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각 지역에 행정구역을 정하고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을 통제하는 제도이다. 일반 군현의 체계는 주속체계(主屬體系)라 하여 주현과 속현이 있었다. 이를 통해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구성하는 토지 및 부세·부역의 수취체계를 원활히 운영하고자 했다.
983년(성종 2) 12목(牧)에 처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한 이후, 부산은 형식상 상주목(尙州牧)에 속하였다. 995년(성종 14)에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2경(京) 4도호부(都護府) 10도(道)로 편제하면서, 부산 지역은 영동도(嶺東道)에 속하였다. 부산의 경우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은 없었다. 서구가 속했던 동평현에 대해서는『고려사(高麗史)』지리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동평현은 본래 신라의 대증현이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동래군에 속해 있는 현으로 삼았다. 1018년(현종 9)에 본주(양주(梁州): 양산)에 내속되었다. 절영도(絶影島)가 있다.”고 하였다. 동평현에 속해 있었던 서구 지역도 양주의 소속이 되었다. 이와 같이 부산은 신라시대에 지방관이 파견되어 독립된 군현체제를 이루고 있었다가, 고려시대에 이르러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양주나 울주의 속현으로 전락하면서 열악한 조건에 놓이게 된다. 부산 지역이 한동안 후백제의 영토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백제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고려는 징벌의 의미로 이 지역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서구가 속한 동평현에는 향(鄕)·소(所)·부곡(部曲)이 없었지만, 부산에 향·소·부곡의 특수 행정조직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점 또한 이러한 조치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 서구 지역은 양주의 속현인 동평현의 작은 마을에 불과하였으며, 인구가 많이 거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 및 신라시대에는 부산이 대외전쟁과 교섭에서 관방의 요충지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에 비해, 고려의 대외관계는 북방의 요(遼)·금(金)·원(元)과의 대립과 교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부산이 그리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몽항쟁과 삼별초항쟁을 통해 한반도 동남 지역의 지역적 중요성이 커져 갔고, 이후 여원동정(麗元東征)으로 촉발된 왜구의 창궐로 인해 군사적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어 갔다.
14세기 중반 왜구의 침입은 한반도 남부 뿐 아니라 평안도·함경도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 규모가 커지면서 그 피해가 극심하여 국가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고려는 군사제도 정비와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이면서, 해안 지에 방어시설을 증설하고 산성(山城)·읍성(邑城) 등도 강화하였다. 서구 또한 왜(倭)가 들어오는 길목 중 하나로 군사적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이에 따라 남해 일대와 인근의 녹산, 성화례산, 가덕도 연대봉, 황령산, 천마산 등 동남해안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봉수대와 성곽이 설치되었 다. 천마산 석성 봉수대의 주변에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 조각과 분청사기 조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는 수소(戍所)로 이용되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데 조선이 건국되면서 서구는 관방의 요충지로 그 역할이 더욱 중시되어 갔다.
한편, 고려 말에 왜구를 토벌하면서 성장한 신흥무인세력은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신진사대부와 함께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와 함께 지방 통치 조직을 새롭게 개편해 나갔다. 동래군의 속현이었던 동평현은 1405년(태종 5)에 양주의 속현에서 다시 동래의 속현이 되었고, 1409년에 다시 양주에 소속되었다가 1428년(세종 10) 동래의 속현이 되는 등 그 소속이 자주 바뀌었다. 이후 속현제도가 없어짐에 따라 동래현에 통합되었다. 1547년(명종 2)에 동래현은 국방과 대일외교의 역할이 인정되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면서 당상관 문관이 부사(府使)로 부임하였다.
부산은 1397년(태조 6)에 부산포(釜山浦)에 진(鎭)이 설치되는 등 왜구의 침략을 가장 먼저 막는 국방상의 요지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어 갔다. 이와 함께 고려 말 설치된 천마산 석성 봉수대가 계속 운영되었다. 조선의 봉수제도는 고려의 제도를 발전시킨 것으로 횃불을 올리는 거화(炬火)방식이었다.
봉수에는 5개 경로가 있고, 그 종류는 경봉수(京烽燧), 내지 봉수(內地烽燧), 연변 봉수(沿邊烽燧)이다. 석성 봉수대는 제2경로 간봉인 연변 봉수로서, 이 봉수의 순서 석성 봉수 → 황령산 봉수 → 간비오봉수(해운대 우동) → 남산 봉수(기장) → 임봉수(울산)를 거쳐 북상하여 경북 영해에서 안동을 거쳐 서울의 남산으로 이 19개 봉수로 되어 있었다.
석성 봉수대는 가장 먼저 적을 탐지하는 장소이자 다대포진을 방어하는 후망소(侯望所)로서의 임무를 맡았다.『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황령산 봉수대 및 간비오산 봉수대와 더불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425년(세종 7)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석성 봉수대는 1725년(영조 1) 동래부사 이중협의 건의에 따라 봉수대가 천마산에서 구봉산(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소재)으로 옮겨지면서 폐지될 때까지 300년간 봉수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구는 조선 전기 관방 요충지의 역할과 함께 국가에서 운영하는 목장이 설치된 지역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주요 역참(驛站)을 연결하는 수단이 말이었기 때문에, 말의 생산과 관리는 국가의 주요 정책 중 하나였다. 초원지대가 있었다는 초장동(草場洞)과 하늘[天]에서 용마(龍馬)가 내려와 서식한 곳이라는 뜻의 천마산이라는 지명 유래와 목 장리(牧場里)라는 조선 후기 지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서구는 초지(草地)가 많고, 겨울철에는 북서풍의 영향을 덜 받는 따뜻한 지역으로 말을 기르기에 좋은 입지 조건을 가지고있었다.
1663년(현종 4) 허목(許穆)이 작성한『목장지도』「동래부 목장지도」에서 서구 일대에 목장이 설치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동래부에는 다섯 목장이 있다. 그 한 곳은 절영도에 설치했는데, 동서 13리이고 남북7리, 둘레는 40리이다. 부(府) 남쪽30리에 있으며 말은 암수 합하여 111필, 목동은 73명이 있다. 오해야 항(吾海也項)은 둘레 60리로 부 남쪽 40리에 있으며 본 관청의 둔(屯)을 설치하였다. 석포(石浦)는 둘레가 25리이며 하였다.”라고 하였다. 부산에는 총 5개의 목장이 있었으며, 오해야항 목장은 세 곳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 중 한 곳이 서구 일대였다.
오해야항 목장은『태종실록(太宗實錄)』1416년(태종 16) 1월 21일 조의 오해야항 목장의 축조에 대한 기록을 통해 1416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말들을 가두어 두기 위한 성곽이 있었다고 전한다. 1740년(영조 16)의『동래부지(東萊府誌)』에는“목장성은 세 곳에 있는데 하나는 엄광산 산록에서 부산 범천산까지의 길이 15리요, 하나는 옛 다대 강변에서 석성산 산록까지의 길이 10리요, 하나는 황령산 산록에서 남천 강변까지 길이 15리다.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다.”고 하였다. 오해야항 목장의 성벽 중 하나는 낙동강에서 승학산을 거쳐 천마산 앞쪽으로 이어지며, 부산 지역의 목장 중 최대 규모였다.『경상도속 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를 보면 이 지역에는 말 793필이 방목되어 절영도 목장의소 276두, 석포 목장의 말 232필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가축이 방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서구 일대에는 조선 후기 목장성이 폐쇄될 때까지 국가 주도의 목장이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부산은 국방상의 요충지이면서도 대일(對日)교섭의 관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회유책으로 일본인의 왕래를 허용하였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1407년(태종 7)에 제포(薺浦), 부산포(釜山浦)에 왜관을 설치하고 이후 염포(鹽浦)에도 왜관을 설치하였다. 왜관은 일본의 사절과 상인이 상주하며 외교와 무역을 하던 곳이었다. 왜관은 개항장의 설정과 변천에 따라 설치와 폐지가 거듭되었으며, 양국 간의 충돌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했다. 1547년(명종 2)에는 부산포에 단일왜관이 들어섰으며, 그 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폐쇄되고, 일본의 지속적인 요구로 1607년(선조 40) 두모포왜관(豆毛浦倭館)이 설치되었다. 이후 일본의 요청에 따라 1678년(숙종 4) 초량(草梁)으로 옮겨 용두산 공원 일대에 초량왜관이 설치되었다. 당시 초량왜관 주변의 조선인 촌락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왜관의 설치와 함께 대티고개로 강제 이주되면서 대치촌이 생겼다는 설이 생겼다. 초량왜관에는 500명 정도의 일본인이 거주하였고 외교와 무역을 위한 건물이 늘어서 있어 조선 속의 일본인 마을이라고 불렸다.
서구는 왜관과 가까워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국가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접촉을 엄격하게 통제하였지만, 서구의 지역민들이 왜관 근처에 가서 일본인과 교류하기도 하였으며, 일본인들이 왜관 밖으로 왕래할 때 서구 일대를 드나들기도 했다.
1796년(정조 20)에 오다 이쿠고로[小田幾五郞]가 저술한『초량화집(草梁話集)』에는 “초량왜관 밖에서 열리는 아침 시장[朝市]에 생선이나 야채를 가지고 오는 곳이 있다. 부산, 두모포, 대티, 사도, 당동 등의 지역이 대표적이다”,“암남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서 왜관의 연례송사를 접대하는 아침밥이나 반찬 등을 가져오기도 했다”,“개시에 오는 것은 동래, 부산은 물론, 전포, 동평촌, 무산촌 등지에서 도자기[燒物類]를 가지고오고, 대치 목장변에서는 가마니[繩俵]를 가지고 오고”라고 기록돼있다. 대티의 사람들을 비롯하여 서구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왜관 아침시장에 많이 참여하였는데 아침시장은 왜관의 수문 밖에서 매일 열리는 시장으로 판매자인 조선인과 소비자인 일본인이 만날 수 있는 합법적 장소였다. 조선인과 일본인과의 단골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으며, 꼭 물품을 거래하지 않더라도 친분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마도에서 해마다 파견하는 사신인 연례송사(年例送使)를 접대하기 위해 서구의 사람들이 음식을 싸서 왜관에 드나 들기도 했다. 이처럼 서구의 지역민들은 왜관의 일본인과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많은 교류를 했으며,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통제된 공간인 왜관을 벗어나 그들과 다른 조선의 모습을 보기 위해 늘 왜관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였다. 일례로 일본인들은 구덕산을 넘어 당감동의 선암사(仙巖寺)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처럼 서구는 그들이 왕래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은 면리제(面里制)를 통해 군현 하부 촌락을 지배하였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면 서구는 북구, 사하구 및 중구 일대와 함께 동래부의 사천면(沙川面)에 속하게 된다.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와 인구 증가에 따른 자연촌의 성장으로 조선 후기 면리제는 새롭게 편제되었으며, 동래부의 행정구역은 1740년의 경우 읍내면(邑內面), 동면(東面), 남촌면(南村面), 동평면(東平面), 사천면(沙川面), 서면(西面), 북면(北面) 등 7면 22동 79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후 서구가 속한 사천면의 경우 분면(分面)이 진행되었다. 사천면은 상단(上端)과 하단(下端)으로 나누어져 있던 것이 사천면과 사하면이 되었다. 1871년(고종 8)에는 다시 합면(合面)되기도 하였다. 사천면의 구초량리, 대치리, 암남리 등이 지금의 서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사천면은 군진(軍鎭)이 모여 있어 군영에 필요한 인구의 유입과 이동이 많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서구의 많은 주민들이 주변의 군진이나 왜관에 관련한 일에 종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서구의 서쪽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고개가 발달하였다. 서구는 오래전부터 부산에서 외부 지역으로 나가기 위한 중간 통로 및 주요 교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대티고개, 까치고개, 샛디고개, 구덕고개 등이 그 예이다. 대티고개는 구덕산의 산등성이에 해당되는 시약산과 아미산 사이에 있는 고개로 까치고개와 함께 부산에서 하단으로 넘어가는 교통로였다. 구덕고개는 구포와 낙동강 방면을 이어주는 고개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고개였다. 조선시대 서구의 고개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었으며, 이를 통해 지역 간의 교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