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방과 서구의 풍경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이 날은 일제강점기 35년의 암울한 역사를 끝내고 독립을 쟁취한 날이었다. 전국은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희망의 기운으로 넘쳐흘렀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해방 다음날인 8월16일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건국 사업에 뛰어들었다.
부산과 경남 지역에서도 국가건설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부산이 포함된 경상남도 건국준비위원회가 1945년 8월 17일에 동래 동운관에서 결성되었다.
부산 각 지역에 지부조직을 마친 건국준비위원회 위원들은 서구 부민동에 위치한 경상남도 도청을 접수하러 갔다. 당시 노부하라[信原] 경남도지사와 3시간 동안 연석회의를 했지만, 일제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결국 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의 경남도청 접수는 좌절되고 말았다.
해방 이후 부산 지역 사람들은 일본인 경찰과 친일 경찰들이 물러난 자리에 자발적으로 치안대를 조직하여 질서 유지 활동을 하였다. 지역치안대와 직장치안대도 조직되었다. 부산 서구와 중구 지역의 유지 장인달, 한석범, 김자장 등이 중심이 되어 ‘서부치안대’가 결성되었다. 사무실은 부용동1가에 있던 서부 양조장에 두었다. 치안대원들은 양복 위에 대검을 두르거나 권총을 차고 교대로 순찰을 나가거나, ‘치안대’라 적힌 완장을 두른 민간인 복장으로 각 치안대 정문을 지켰다. 치안 대원들은 주로 서구 서대신동1가에 위치했던 부산제2공립중학교(지금의 경남고등학교)와 부산제2공립상업학교(지금의 개성고등학교), 동래중학교 등의 재학생과 졸업생들로 구성되었다.
동대신동2가 부산형무소에도 해방의 감격이 터져 나왔다. 부산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정치범들이 1945년 8월 16일 오전 11시 30분에 석방되었다. 3백~4백 명의 군중들은 목탄 숯으로 움직이던 트럭에 ‘조선독립만세’ 현수막을 써 붙이고, 열띤 환호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일제의 압제에서 풀려난 백여 명의 정치범들은 감격과 환희로 해방을 맞으며, 목이 메여 환호하는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8월 17일에는 경제사범들이 석방 되었다.
1945년 9월 16일, 미군 제24군단 제6사단 선발대 장교 60명과 사병 280명이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부산에 진주하였다. 미군은 9월 17일 일본군 부산요새사령부와 아까쯔끼 부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경남도청과 부산부청사를 접수하였다.
패망하여 귀국하는 일본인들은 ‘세와까이(世話會)’를 조직하였다. 세화회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데 필요한 편의와 수속절차를 도와주기 위한 민간단체였다. 미군정과 교섭하는 역할을 맡았고, 서울, 인천, 대구, 군산 등 각 지역에서 조직된 세화회는 부산 세화회와 합류하여 자기 연고 지역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일본인들은 부산 18개 사원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을 거두어 연고자가 있는 유골은 일본으로 가져갔고, 연고자가 없는 유골은 아미동의 일본인 묘지에 매장하고 떠났다. 떠나는 일본인에 대해서 조선인들은 보복하지 않았다. 이는 부산 시민들이 가진 관용성에도 까닭이 있었지만, 우리 귀환동포의 안전귀국을 위해서라도 일본인을 안전하게 보내주자는 생각이 더 컸던 것이다.
1945년 12월 1일 현재 돌아간 일본인은 30만 명이었고, 일본으로부터 귀환한 조선인은 56만 명이 넘었다. 부산 사람들은 빈주먹으로 돌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귀환동포에 대한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경남도청 근무 한국인 관리가 중심이 되어 1945년 8월 30일 ‘귀환조선인원호본부’가 구성되었다. 같은 날에 민간 유지들이 발 벗고 나서 ‘조선귀환동포구호회’를 조직하였다. ‘조선귀환동포구호회’는 뒤에 ‘건국준비위원회’가 흡수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원호회 경남지부’로 바뀌었다.
귀환동포가 돌아오자 곧 겨울이 닥쳐왔다. 갈 곳 없는 귀환동포들은 부산역 대합실이나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다가 빈터를 찾아 겨울을 지내기 위해 판잣집을 지었다. 그것이 부산에 판잣집이 곳곳에 생겨나는 시초가 되었다. 귀환동포 중에서 부산역이나 남포동 등지의 시내 중심가 주변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서구 서대신동 구덕령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빈터를 일구어 배추, 무, 호박을 가꾸고, 나무를 하여 시내 중심지로 가져다 팔며 어려운 생계를 유지하였다.
부산 여러 곳에 귀환동포를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 들어섰는데, 서구에는 대신동 ‘수산장아동탁아원’에 귀환동포 수용소가 있었다. 귀환동포가 급격히 늘어나자 교사 부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1946년 부산제2공립중학교(1946년 3월, 경남공립중학교로 개명)에 경상남도 초등 교원양성소와 경상남도 중등 교원양성소를 설치하였다. 이 교원양성소는 일제 때 중학 또는 고등교육의 수학경력이 있는 사람을 입학시켜 단기간으로 교원을 양성하여 교사 부족 문제에 대처하였다.
(2) 1948년 정부수립 전후의 서구
1947년 7월 1일에 부산시의 일본식 동명을 우리말로 개칭하였다. 정(町)을 동(洞)으로 고치고, 정목(町目)을 가(街)로, 통(統)을 로(路)로 바꾸는 식이었다. 서구 각 지역의 일본식 동명도 바꾸었는데, 부민동 남쪽에 위치한 남부민정은 남부민동으로, 동대신정은 동대신동으로, 서대신정은 서대신동으로 고쳤다. 부민동 일부인 곡정 1·2정목은 아미동1가·2가로, 토성정은 토성동으로, 초장정 1·2·3·정목은 초장동1가·2가·3가 등으로 바꾸었다. 지금의 충무동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천황의 연호를 따서 ‘소화정’으로 불렸는데, 일제식 동명 개칭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충무공 이순신 영모비)을 세우면서 처음 충무동으로 바꾸어 불렀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부산은 경상남도 선거위원회 관하에 부산시 갑, 을, 병, 정선거구가 설치되었다. 갑선거구는 동래구와 부산진구, 남구 중심이었고, 을선거구는 동구 중심, 병선거구는 중구 중심, 정선거구는 영도구 중심이었다.
서구의 각 동은 병과 정 선거구로 나누어졌다. 부산부 병 선거구에는 동대신동, 서대신동, 부용동, 부민동, 아미동, 초장동, 완월동, 남부민동 등이 속했고, 토성동과 충무동은 부산부 정선거구에 포함되었다.
서구 대신동과 토성동, 초장동 일대에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가옥, 즉 적산가옥이 다수 있었다. 귀환동포들과 부산 사람들은 사연은 각기 달랐지만 일본인들이 물러간 집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1948년 11월 말에 동대신동과 서대신동 일대의 적산가옥에 거주하고 있던 260세대 1,424명에 대한 퇴거 명령이 군부(軍部)로부터 발동되었다. 이들 적산가옥 거주인들은 해방 후 부산부 후생과의 알선으로 적산관재처와 정식 계약을 체결하고 입주한 이재민들이었다. 한편, 적산가옥은 기업가의 사업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1945년 9월 진주에서 귀환동포와 미군 진주로 북적이는 부산으로 사업 터전을 옮긴 LG창업주 구인회(具仁會)는 일제가 남기고 간 서대신동 적산가옥을 사들여 1945년 11월 ‘조선흥업사’를 설립하였다. 조선흥업사는 미 군정청이 승인한 무역업 제1호 업체였다.
정부수립 이후에도 각종 행사와 연설회 등이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1948년 12월 3일 대신동 공설운동장에서 조봉암 농림부장관과 부산 부윤, 그리고 기타 유명인들이 참석하여 부산 민보단 발단식을 가졌다. 민보단은 1948년 5·10총선거 때 조직되어 1950년 봄까지 경찰의 하부 지원조직으로 활동한 단체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5월 20일 공설운동장에서 5·30총선을 앞두고 ‘반정부 활동을 하거나 그런 경력을 가진 인사들에 대한 투표를 고려하고, 당선된 뒤에는 주민들이 협의하여 소환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1949년 6월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 활동 경력자, 자수자들의 사상 전향 활동을 중점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국민보도연맹’이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 1949년 말부터 1950년 봄까지 부산 지역에서도 국민보도연맹 지부가 속속 결성되었다. 서구에서는 1950년 1월 22일 국민보도연맹 완월동단부가 결성되었다는 신문기사가 확인된다.
1949년 8월 15일 부제(府制)가 시제(市制)로 바뀌어 비로소 부산부가 부산시가 되었다. ‘서구’라는 구명(區名)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1950년 5월 30일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서구가 속해있던 정선거구에서는 11명이 출마하여 경상남도 군정장관 고문이자 동아대학장이었던 정기원(鄭基元)이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