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서구청 문화관광 스킵네비게이션

서구역사
서구역사
근현대

일제강점기

(1) 일본인의 부산 진출과 거류지 형성

개항이 되기 전 부산은 한가로운 어촌이었다. 개항이 되기 전 부산포는 배의 항해가 어려울 만큼 해조류가 무성하여 어장으로서 최적의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개항 직전 부산포에는 130여 곳에 어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2천여 어민이 여기에 종사했고, 이 무렵 부산에는 이미 일본인 80여 명이 살고 있었다.
개항 이전 부산의 중심은 전통 도시 동래였지만, 개항과 함께 항구 가까이에 위치한 초량왜관 부지에 근대 건물이 들어서면서 도시 공간이 확장되었다. 강화도조약 다음 해인 1877년 1월, ‘부산구조계조약(釜山口租界條約)’이 체결되어 초량왜관은 그대로 치외법권적인 일본전관거류지(조계)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조계지 설정 교섭이 진행 중에 있던 1876년 11월, 공관 안에 일본우편국이 설치되었고, 1878년 1월에는 조선정부의 허가를 받아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이 개점하였다. 그리고 1879년에는 초량왜관 관수가(館守家: 관수는 왜관 일본인을 관리하던 최고관리자)에 일본영사관이 건립되면서, 용두산과 용미산을 사이에 두고 상점가가 형성되는 등 초량왜관은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지역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부산 중구 동광동, 광복동, 창선동, 신창동 등 부산의 중심을 이루는 지구의 원형이 된 것이다.
더불어 도시 기반 시설의 확장도 두드러졌다. 은행, 상하수도, 병원 등의 시설이 들어 서고 일본인 인구의 증가에 동반하여 시가지의 구획 정리가 서둘러졌다. 게다가 개항 무렵 80여 명에 불과했던 일본인이 10년 뒤인 1886년 1,957명, 1906년에는 15,986명으로 급속히 팽창하였다. 부산은 조선의 다른 지역으로 통하는 관문 항구 도시이자 정착지였다. 즉 일본과의 지리적 근접성과 이에 따른 무역의 용이함은 많은 일본인들을 부산에 정착하게 하였고, 무역액 또한 계속해서 증가했다. 결과적으로 부산의 무역량과 일본인 거류민의 숫자가 비례하는 양상이 나타났고 개항 당시 약 11만 평이었던 일본 거류지의 경계를 넘어 거주 지역을 정하는 일본인이 증가하였다. 전관거류지를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이 지역에는 조선인 인구도 꾸준히 증가하였으나,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일본인 중심의 도시 발달에서 점점 소외되어 도시 외곽지역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2) 근대적 도시 시설의 집중

서구 지역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강제병합 이후 ‘서부유지’로 지칭된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우선 한국와사전기주식회사(1910년 설립, 1913년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로 개칭, 부평동·토성동) 등 주요 산업시설과 함께 농상무성 우역혈청제조소(1911년, 1918년 ‘조선총독부 수역혈청제조소’로 개칭, 암남동)와 경상남도 수산시험장(1936년, 충무동) 등 공공기관이 설립되었다. 또 송도해수욕장(1913년, 암남동)이 개장한데 이어, 대정공원(1918년, 토성동), 부산공설운동장(1928년, 동대신동) 등 근대적 여가·체육시설과 함께 부산부립병원(1936년, 아미동)과 같은 공공의료기관까지 자리 잡으면서, 1920년대 이후 서구 지역의 도시발전이 크게 진전되었다. 특히 공원과 운동장은 여가 활동과 신체의 단련, 대중 집회의 공간으로 근대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 시설이므로 서구가 행정·문화·주거 중심지로서의 도시기능을 담당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국내 최초의 공설해수욕장인 송도해수욕장은 당시부산의 대표적 근대휴양지였다. 휴게소, 탈의장, 잔교 등의 설비를 갖추었고, 여름철에는 1시간마다 발동기선을 운항하며 부산 시내의 일본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후 남항매축공사로 도로망이 확충되면서 송도와 시내가 더욱 빠르게 연결되었다. 이로 인해 1936년 송도가 부산부로 편입되었고, 지금의 서구 모습이 갖추어졌다.


(3) 소외된 조선인 마을

일제강점기 지금의 서구는 일본인들에 의해 ‘신시가지’로 개발된 지역이었다. 서구의 일본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조선인들은 일본인 가옥 주변의 비탈이나 고개로 올라가 터전을 잡았다. 이에 따라, 서구의 거주지역은 시내에서 가까운 토성동, 부민동과 대신동 일대의 평야지대에는 일본인들이, 대신동과 아미동, 남부민동, 초장동 등의 고지대에는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형태로 분리되었다.
서대신동을 감싸 안은 구덕산 아래로 ‘고분도리’, ‘대밭골’, ‘황토굴’, ‘딱박골’등으로 불린 조선인 마을이 있었다. 마을이 언제부터 존재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고분도리 마을이 있었던 위치인 지금의 서대신동 일부 지역이다.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게 밀려난 조선인들이 거주하면서부터이다. 구덕산 기슭의 고지대에 형성된 이들 마을의 모습은 경상남도청과 부산지방법원, 부산형무소 등 주요 기관에 다니는 일본인 관리들의 현대식 주택들로 가득 찬 대신동 거리의 모습과는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대신동의 구덕산 빈민촌은 부산에서 뿐만 아니라 전 조선에서 손꼽히는 대표적인 빈민촌이었다. 거의 ‘룸펜’에 가까운 조선인들이 북적거리며 살고 있었는데, 그들의 허름한 주택은 일명 ‘빠라크’로 불렸다. ‘빠라크’는 기둥을 세운 후 양철조각이나 가마니조각 등을 되는대로 덮거나 널빤지를 맞추어서 만든 가옥으로, 당시 빈민촌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마치 ‘돼지우리’처럼 보였다. 이 볼품없는 집에도 주인은 따로 있어서 대신동 빈민촌의 대부분의 집들은 일본인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의 집으로, 1칸에 매달 2, 3엔의 집세를 내야 했다.
서구의 아미동 또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조선인 거주지였다. 일제강점기 곡정(谷町)으로 불렸던 아미동에 1907년 복병산에 있던 일본인공동묘지가 옮겨온 후, 1909년에는 대신동에 있던 화장장이 이전해 왔다. 처음 화장장이 들어설 무렵 아미동 부근은 약간의 조선인 가옥과 군데군데 일본인 주택이 있는 정도로 사람들은 거의 살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후 일본인공동묘지를 거쳐 암남으로 통하는 도로가 만들어지고 다시 하단으로 통하는 도로가 정비되면서 그 주변으로 조선인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1920년대 후반에는 1,000여 호의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이르렀다. 2~3년 동안에 갑자기 만들어진 아미동에서도 조선인들은 역시 ‘빠라크’에 거주하였다. 이곳에 거주한 조선인들은 부산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만큼 영주동이나 수정동, 초량동 등 항만 가까이에 거주했던 조선인들보다 일자리 구하기는 더 어려웠고, 그만큼 굶주림에 시달리는 빈민들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많았다. 다만 일본인에게 필요한 시설이었던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었던 탓에 도로 사정은 다른 빈민촌보다 나았다고 한다.
이러한 서구의 조선인 거주지는 일본인 거주지와 분리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산을 근대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일제가 조성한 각종 도시기반시설의 혜택도 전혀 받지 못했다. 시가지계획령 하에서 시가지 곳곳의 도로가 정비되고 있었지만, 조선인 거주지로 이르는 도로는 여전히 꼬불꼬불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상태 또한 진흙투성이여서 비가 오는 날이면 미끄러져 다니기조차 힘들었다. 지대가 높은 곳이다 보니 상·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대개는 우물물을 마셨고 오폐물은 도로나 개천에 버리는 경우가 많아 위생에도 문제가 많았다. 위생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 보니 전염병에 노출되기도 쉬웠다. 실제로 부산부는 1938년 대신동과 아미동 등의 고지대를 ‘전염병병원(傳染病病源)’으로 규정지었다.
조선인 거주지와 일본인 거주지에 대한 이러한 부산부의 차별적인 시책은 조선인들의 불만을 야기하였다. 조선인들은 이를 조선인과 일본인에 대한 민족차별정책으로 해석하면서 시정의 목소리를 높여갔다. 1920~1930년에 걸쳐 대신동 시구개정에 대한 요구를 끊임없이 제기하는 한편 구덕산로(九德山路)의 개수와 대신동 입구에 있던 흑교(黑橋)의 확대와 같은 도로·교량시설의 개선, 초장동과 아미동 방면의 오물시설 개선 등을 요구하였다. 조선인들의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요구들은 부산부회의 중요한 안건으로 상정되기도 하였다. 1934년 3월에 개최된 부산부회에서는 조선인 의원들이 조선인이 주로 거주하는 고지대의 도로를 정비해 줄 것, 쓰레기와 분뇨의 처리를 일본인 거주지역과 같이 할 수 있게 해 줄 것 등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전원 사퇴하기도 하였다.


(4) 전시체제기 동원과 저항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부산은 일제의 대륙진출 관문이자 병참기지로서 군사적 거점이 되었으며,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즈음에는 병력수송과 본토 방어에 있어 주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패전이 농후해지는 가운데, 1945년 2월 하순 미군이 필리핀 마닐라를 점령하였고, 4월에는 오키나와에 상륙하여 일본 본토를 향해 맹렬히 공습을 전개하기에 이르자, 본토의 관문으로서 부산을 포함한 대한해협의 전략상 중요도는 더욱 커졌다. 이에 일제는 미군을 상대로 한 일본 본토에서의 결전과 소련의 침공을 막기 위한 준비를 동시에 해야 했고, 한반도에서도 이 두 가지 방위태세를 함께 수립해야 했다. 이를 위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일본 본토의 방위군과는 별개로 제17방면군을 신설하여 그 작전지역의 경계를 대한해협으로 하고 종전의 조선군사령부를 해체하였다. 서구 지역에서는 대정공원이 병영으로 활용되어 군사훈련과 군마를 사육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구를 비롯한 부산 일원에는 많은 군사시설과 병기고가 있었다. 이곳들은 1945년 9월 16일 미군의 진주와 함께 일제히 무장해제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 결전을 위한 부대배치와 함께 극단적 전쟁 수행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도 바야흐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 사법적 계기가 된 것은 중일전쟁 직후인 1938년 제정된 ‘국가총동원법’과 1939년의 ‘국민징용령’이었다. 이 법에 따라 수많은 조선인들이 군·군속·노무자·위안부 등으로 강제동원되었으며, 이에 대한 진상규명과 배상이라는 역사적 과제는 현재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국방의 의무가 없던 조선인 청년들을 전장에 끌어내기 위한 ‘징병제’를 1944년부터 시행하기로 한 것에 대해 조선인의 입장에서 환영하고 감사한다는 취지의 행사가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부산일보』1942년 5월 13일자). 기사에 따르면, 각종 어용단체와 함께 장래 징병의 대상이 될 중등학교 이상 남녀 학생 전원 등 집회참가 인원이 1만 명에 이른다. 일제강점기 말의 일상이란 이렇게 숨을 곳 없는 총동원의 나날이었다.
당시 학생근로동원은 ‘학생근로보국대’라는 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명목은 학생들을 엄격한 규율 통제 하에 두고 공익에 관한 집단노동을 시킴으로써 근육노동을 존중하도록 하고 국가에 대한 봉사정신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최종목표는 물론 견실한 황국신민을 육성하는 데에 있었다.
무리한 근로봉사작업에의 강제동원과 그 속에서 행해지는 민족차별에 이르기까지 청년학생들의 일제에 대한 반감과 저항도 곳곳에서 치솟았다. 저항은 소극적 방법부터 적극적 방법까지 다양하였는데, 당시 부산에서 가장 적극적 방식의 저항운동의 하나로 1940년 서구 일대에서 동래중학교,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에 의해 전개된 ‘부산항일학생의거’, 소위 ‘노다이[乃台]사건’을 들 수 있다.

서구청 홈페이지 내 게시된 자료는 공공누리 출처표시 후 저작물 변경없이 이용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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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수정일 : 202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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