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직할시대(1963~1994)
1963년 1월 1일을 기하여 부산은 정부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부산시 서구청’은 ‘부산직할시 서구청’으로 바뀌었다. 부산은 대한민국 유일의 직할시가 되어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였다. 서구도 이에 발맞추어 변화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한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가 부산시 직할시 승격 다음해인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70년대 이후 부산 서구는 빠르게 변화해 갔다. 여러 터널을 개통하고 도로 확장 공사를 벌였으며, 불량주택 개선사업을 추진하는 등 주민 주거와 생활, 문화 등 여러 부문에 걸쳐서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였다. 부산교도소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였고, 사창화 되어 있던 완월동에 대한 정비 계획도 마련하였다.
1971년 4월, 영주터널을 이어 부산의 두 번째 터널인 대티터널이 개통되었다. 서구와 사하구를 연결하는 터널로서, 도심지 교통체증 완화와 함께 물동량 운송에 크게 기여하였다. 터널 공사로 헐리게 된 세대들은 장림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또한 1981년 4월 4일에 착공한 구덕터널이 1984년 8월 11일에 개통되었다. 서구, 중구, 영도구, 동구에서 사상구로 가려면 서면을 거쳐서 가야 되는 불편이 있었는데 이동 거리를 획기적으로 단축시켜 주었다. 더구나 부산항과 남해고속도로를 연결하여 물류 유통에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 새마을운동이 전개되었다. 1970년 10월 새마을 가꾸기 사업 추진 요령을 받은 서구에서도 ‘주민 다수가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사업’, ‘비용이 적게 들고 사업효과를 높일 수 있는 사업’, ‘지역 실정에 맞는 시급한 사업으로 주민이 원하는 사업’을 선정하여 운동을 추진하였다. 부민동의 새마을 가꾸기 사업 건수는 총 11건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이 8통 지역 골목길 포장공사였다. 부민동 8통 지역은 해발150m 지점으로 산복도로보다 위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이곳은 주로 함경도 출신 피란민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고지대 영세민촌이었다. 1970년 10월 24일 묘법사 마당에서 주민 61명이 참석하여 사업 추진 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주민 부담과 작업 방법을 결의한 후 이틀 뒤부터 작업에 들어갔다. 주민들은 자기 집 담장을 기꺼이 허물었고 분담금 1,600원도 자발적으로 내놓았다. 착공한 지 14일 만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부민동 8통의 골목길 포장공사는 관과 주민이 협력하여 추진한 도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의 모범 사례로 알려지게 되었다.
1973년 1월 동대신동 동쪽 고지대 산마을 ‘동산리’ 불량주택 개량사업이 추진되었다. 이곳에는 한국전쟁 이후 600여 채의 판잣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당시 동구 범일동과 좌천동 일대의 판자촌과 함께 대표적인 불량주택지구로 꼽히고 있었다. 서구청에 「불량주택개량후원회」가 발족하였고 동별로 주민들 자체의 불량주택사업조합이 결성되었다. 주민들은 스스로 삽과 괭이를 들고 나와 판잣집을 헐고 새로운 공사를 시작하였다. 주택 대지는 후원회가 나서서 지주들로부터 시가의 3분의 1 남짓한 평당 7천 원이라는 헐값에 분할 상환할 수 있도록 사주고 국유지는 불하해주었다. 주민들은 모래와 자갈 등을 괴정천에서 직접 채취해서 블록을 만들었고 후원회는 시멘트, 목재, 철근 등을 생산공장과 교섭하여 공장도 가격으로 구입하도록 알선해주었다. 1973년 10월 말에 40~50평 대지 위에 한 채당 20~24평짜리 연립식 문화주택 246채가 준공되어 1채당 2가구씩 492가구가 입주하였다. 이는 지저분하던 판자촌이 색다른 방법으로 아담한 문화주택촌으로 바뀐 사례지역으로 널리 알려졌다. 구청 직원들이 판잣집을 때려 부수고 주민들이 이를 막느라고 아우성치는 소란이 없이도 판자촌이 철거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행정관청과 주민들의 협조 아래 해묵은 문제가 원만히 풀려가자 건설부는 각 시도 건축관계자들을 현지로 보내 견학까지 시킬 정도로 불량주택 개량사업의 새로운 실험으로 평가되었다. 이 마을은 건립 이후 ‘무지개 마을’로 명명되었으나 ‘동산리’마을의 지명을 대체하지는 못하였다.
1973년 12월 23일 부산교도소(옛 부산형무소)가 주례동으로 이전하였다. 부산교도소터는 삼익건설에서 사들여 1976년 6월에 아파트 13개 동과 상가아파트 3개 동을 건축하였다. 당시 부산에서는 남천동 삼익아파트와 함께 초창기에 건설된 아파트로서 동대신동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 부산 서구청은 1961년 「윤락 행위 등 방지법」이후 사창화 되어있던 완월동 양성화 방안을 검토하였다. 사실상 공창이 부활될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1977년 당시 118개소 1천여 명의 여성이 윤락행위를 하고 있고, 각종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하여 외국인에 한해서만 윤락을 인정하고 있는 속칭‘텍사스촌’과 같이 양성화할 계획을 마련한 것이다. 완월동은 1982년 3월 부산 23개 동 개명 때 완월동1가는 충무동2가로, 완월동2가는 충무동3가로 개명되었다. 이곳은 부산역 앞 ‘텍사스촌’처럼 부산의 대표적인 ‘섹스관광지’로 알려져 있었다. 1983년 당시 부산이 벌어들이는 관광수입은 전국의 10%가량 되었는데, 부산의 관광수입에서 일명 ‘섹스관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충무동2가와 3가로 바뀐 완월동에는 “6개의 대형 관광요정은 밤이면‘수족관’에 분홍빛 불을 밝힌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색시들이 쇼윈도 속의 마네킹처럼 진열된다”고 당시 신문은 완월동 사창가의 풍경을 묘사하였다. 1983년 무렵 완월동에는 5백여 명 안팎의 직업여성이 살고 있었다.
한편 서구는 1970년대 말 민주항쟁의 현장으로도 그 역할을 하였다. 197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의 불길이 치솟았다. 10월 16일 오전 10시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항쟁은 시내 중심가로 확산되었고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가세하면서 거대한 저항으로 번져갔다. 동아대학교 구덕캠퍼스가 있던 서구 지역도 항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는데, 이 민주항쟁 과정에서 경남도청과 서구청, 동대신3동사무소 건물 등이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