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시수도 1000일의 서구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한강교를 폭파하고 대전과 대구, 부산까지 후퇴하였다. 부산 서구는 한국전쟁시기 약 1000일 동안 대한민국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로 기능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되었다.
1950년 7월 27일 대한민국 제2대 국회가 부산으로 내려왔다. 국회는 총선거가 끝난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동란을 맞아 피란을 했던 것이다. 국회의사당은 처음 남포동 부산극장에 임시로 있다가 1951년 3월에 부민동 경남도청 무덕전으로 옮겼다.
정부기관은 1950년 8월 18일에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서구 부민동(당시 부용동2가 16)의 경남도청 건물은 임시 중앙청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에는 총무처와 공보처, 법제처, 내무부, 외무부, 법무부, 농림부, 토목시험소, 국립공무원훈련원 등의 중앙정부기관이 들어섰다. 경남도청 건물 지하실에는 뉴스를 제작하는 공보처의 현상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 임시수도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옛 경남도지사 관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이 되었다. 중앙동 옛 부산시청에는 사회부와 심계원(審計院), 고시위원회, 문교부 등이 자리를 잡았다. 토성동1가 남선전기주식회사(지금의 한국전력 중부산지사)에는 상공부가 들어섰다.
대법원과 서울고등법원·지방법원 등의 사법기관은 당시 경남도청 옆쪽에 위치했던 부민동2가 5번지 부산지방법원(지금의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법대)에 자리를 잡았고, 대검찰청, 서울고등·지방검찰청 등의 검찰기관 역시 부민동2가 5번지 부산지방법원 건물로 옮겼다. 서울지방법원 소년부지원은 부산지방법원 소년부지원과 함께 부용동1가 (지금의 부산중부산등기소)에 터를 잡았다. 각국의 외교관과 외교기관 역시 서구와 중구지역에 주재하게 되었다. 이처럼 서구에 중앙청과 대통령 관저, 국회, 그리고 사법기관 등이 집중됨으로써 부민동 뒷산을 비롯한 서구 일대의 경비가 삼엄해지고 많은 차량들이 부민동 앞 도로를 메웠다. 이와 같이 전시하 서구 지역은 임시수도의 심장부로서 정치,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특히 부민동은 ‘대한민국 정치 1번지’로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아미동에 있던 부산부립병원(지금의 아미동 부산대학교병원)은 육군병원으로 사용되었고, 초장동에는 경찰병원이 자리 하였다. 부립병원에서는 해마다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요인들과 정당 사회단체 임원들이 다수 참석해 후방 치안 전선에서 싸우다 순국한 순직경찰관의 명복을 비는 ‘전국순직경찰관합동추도회’가 열렸다. 부산여중고등학교는 서대신동에 가교사를 지어 피란학교를 개설하였고, 학교 건물은 유엔군이 접수하여 서독병원으로 거듭났다. 서독병원은 전쟁 부상자 치료뿐만 아니라, 1954년 5월 개원 이후부터는 전란을 겪은 영세민 무료 진료를 시작하였다. 특히 외과, 산부인과에 권위 있는 병원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1959년까지 전후 대한민국 재건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0년 7월 이후에는 유엔군이 대신동 공설운동장(구덕운동장)과 학교, 극장 등 주변 시설에 주둔 하였다.
부민동 경남도청 청사에 법원과 검찰청이 자리했기 때문에 이곳 주변에는 법률사무소들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었다. 이 법률사무소 가운데 변재성법률사무소에서는 전시연합 대학 법대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경남도청 주변에는 숙박업소가 산재해 있었다. 특히 경남도청 앞에 있었던 남도여관은 유명하였다. 경남 각 지역에서 출장 온 공무원들이 자주 들렀던 곳으로, 숙박뿐만 아니라 식사와 연회도 개최할 수 있는 곳이었다.
부산 서구와 중구에는 전국에서 피란 온 각 시도 임시연락소가 설치되었다. 서울특별시 임시연락소는 부산시청 내에 설치되었고, 경기도 임시 부산 사무소는 완월동1가 4번지에 있었다. 서구 초장동2가 김재필 집에는 충청북도 임시연락소, 동대신동1가 김용문의 방에는 함경북도 임시연락소가 설치되었다. 평안남도는 보수동 보수양조장, 강원도는 남포동1가 부산여관, 그리고 평안북도는 동광동3가 김찬형의 집에 설치되었다.
대신동 구덕수원지와 대신동시장, 충무로 로터리 등지는 임시수도 행정의 주요 전시·활용 장소로 사용되었다. 구덕수원지는 황폐한 산야에 손질을 해서 나무를 심고 가꾸자는 식수녹화운동의 상징 장소로 활용되었다. 이곳은 농림부와 경상남도, 부산시가 공동주최하고 정부 요인들과 공무원들이 대거 참석하여 거행한 식목일 행사의 단골 장소였다. 한편, 1952년 2월, 전시하 쌀값 폭등에 대비하여 농림부는 긴급대책을 마련하였다. 즉, 정부 보유미를 시장 가격의 7할 정도로 하여 1인당 1말씩 제한 없이 아침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시장에서 자유 판매·구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구에서 쌀을 파는 장소는 대신동시장 입구와 충무로 로터리 옆이었다.
서울에 있던 정부기관과 교육기관 등이 부산으로 옮겨 오고,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유명 정치인과 학자, 예술인들도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 중구와 영도구, 그리고 임시정부가 위치한 서구 지역에 다수 유명인들이 거주하였다. 특히 부민동3가 뒷골목에 자리한 경남도지사 관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전시 정치와 행정을 진두지휘하였다. 이 관사 건물은 대통령뿐만 아니라 각 부 장관들이 드나들었고, 피란 온 관리들이 와서 임시로 머물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1960년 4월 혁명 후의 한 신문 기사에는 ‘피란 관리들의 합숙소로 제공되어 거칠어 질대로 거칠어진 초라한 건물’로 표현되고 있다.
초대 상공부 장관을 지낸 임영신과 재무부 장관을 지낸 최순주의 자택은 초장동에 있었고, 전 주일대사 신흥우는 부민동1가에 숙소를 마련하였다. 서민호 국회의원은 아미동2가에 거주했다.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과 한국신학대 김재준학장이 부민동에서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고, 성균관대학 김창숙 학장은 동대신동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대중가요 ‘빈대떡 신사’를 불러 인기를 누렸던 한복남도 1·4후퇴 후 부산 국제시장에서 축음기 부속품과 유성기 바늘장사로 모은 자금으로 아미동에 방 한 칸 부엌이 딸린 집을 마련해 생활하였다.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 9월에 부산시에 중부, 서부, 영도, 부산진, 초량, 동래출장소 등 6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이는 1951년 8월 31일 「부산시 출장소 설치 조례」에 따라 9월 1일부터 시행된 것인데 서구 지역은 서부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서부출장소는 서대신동2가 옛 서구청 자리에 두어졌다. 서부출장소 명칭은 중앙동에 위치한 옛 부산시청을 기준으로 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다.
1952년 5월 25일 임시수도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남, 전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령이 발동되었다. 다음날 국회의사당으로 등원하던 야당의원 48명이 탄 전용버스를 의사당 정문에서 연행·견인하여 헌병대로 끌고 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비상계엄령은 대통령직선제를 중심으로 하는 ‘발췌개헌안’이 통과된 뒤 7월 28일에 해제되었다. 이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부산정치파동’이라 한다. 이처럼 한국전쟁 시기 서구는 대한민국 정치의 아픈 역사도 간직한 곳이 되었다.
(2) 전쟁과 피란민의 삶
전쟁 발발 직후부터 전국에서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부산은 30만 명정도를 수용할 수 있도록 계획된 도시였다. 피란민들이 머물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학교와 극장, 교회, 사찰 등 큰 건물에 피란민들이 집단으로 수용되었다. 우암동의 적기와 영도의 빈터와 공장, 그리고 초량과 범일동에 수용소를 지어 피란민을 받아들였다. 서구에서도 학교와 종교시설 등에 피란민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남부민동 창고에도 피란민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피란민들은 빈자리만 있으면 어디에나 가마니 떼기로 만든 천막집이나 움막 또는 판잣집을 지었다. 구덕산과 천마산 등 산자락 공터에도 피란민들이 자리 잡았다. 피란민들에게 담장이 있는 집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천막 한 가운데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양쪽 가마니로 출입문을 달아 성인 두 세 명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의 좁은 천막에서 생활하는 피란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서울과 각 도에서는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피란민들을 자체적으로 관리하였다. 완월동에 소재한 경기도청에서는 도민증을 분실한 피란민에게 ‘피란민증’을 교부하였다.
1951년 2월 당시 서울 시민으로 피란 와서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은 약 24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 가운데 서울시 임시사무소에 등록을 한 피란민은 3만 4천 명에 불과하였다. 서울시는 시민증을 분실한 시민에게 시민증을 다시 발급해 주었다.
임시정부와 부산시는 피란민 수용소의 피란민들에게 하루에 1인당 3홉의 안남미와 50원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피란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고, 이마저도 나중에는 보리쌀을 섞어 2홉으로 줄여 배급하였다. 전쟁 때 피란민 구호 음식으로 생겨난 것이 ‘우유죽’과 ‘유엔탕’이었다. 분유에다 푹 삶은 보리쌀을 섞어 만든 ‘우유죽’과 미군이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를 수거하여 탕으로 끓여 만든 ‘꿀꿀이죽’, ‘존슨탕’으로도 불렸던 ‘유엔탕’은 피란민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보양식으로 인기가 높았다.
피란민들의 거처는 열악하였다. 좁고 춥고 비위생적이었으며, 화재에도 취약하였다. 부민동에 설치된 서울 피란국민학교의 화장실에서 오물이 넘치는 사건이 발생하여 교장이 10일간 구류 처분을 받는 일도 발생하였다. 해방 후 귀환동포들과 피란민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서구의 대표적인 마을이 아미동 비석 마을이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일본인들의 무덤이 있었다. 뒤늦게 부산으로 피란 와서 시내 중심지 근처에 미처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곳 공동묘지로 흘러들었다. 가족묘 주위를 직사각형으로 두른 경계석과 외곽 벽은 그대로 집 벽으로 활용했다. 집을 지을 마땅한 재료가 없던시절, 비석과 상석은 축대를 쌓고 계단을 만드는데 유용한 건축자재였다. 눈앞에 닥친 생존을 위해 죽은 자의 무덤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이라는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는데,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이었다.